21대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姜英勳, 1922~2016)은 평북 창성 사람이다.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군 생활을 한 것이 인연이 돼 그는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주영대사, 국회의원, 국무총리 등을 지낸 것은 예편 후의 일이다.
현역군인 시절 강영훈의 기개는 남달랐다. 6군단장 시절에 4.19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 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이를 거부했다.
1961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그는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그는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무관 출신인 강영훈이 육당 최남선과 각별한 사제관계를 맺었다. 강영훈이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육당이 교수로 있는 것을 보고 건국대학 입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만주국은 건국이념인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실현할 지도자 양성을 위해 1938년 5월에 만주 건국대학을 개교했다. 건국대학은 국무원 직할의 국립대학으로 만주국 최고학부였다.
학제는 전기(예과), 후기(본과)로 나뉘어 수업 연한은 각각 3년이었다. 전원 학비 무료에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5족협화(五族協和)’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만주국 고위관리로 취업이 보장돼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애초에 건국대학 설립을 구상한 관동군에서는 민족협화를 달성하기 위해 ‘아시아대학’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만주국 외에 중국 본토,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모집하고 교수진은 다양한 지역 선각자와 지식인, 민족혁명가들을 초빙키로 했다고 한다.
‘육당 연보’에 따르면, 육당은 1939년 4월 건국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예과에서 만몽(滿蒙)문화사를 강의했다고 나와 있다. 육당은 1941년 우이동으로 이사한 후 서재를 ‘소원(素園)’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듬해 11월 병을 얻어 건국대학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육당이 건국대학 교수를 지낸 안을 두고 변절자란 비난이 쏟아졌다.)
강영훈은 1941년 건국대학 3기생으로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조선인 졸업생 가운데 군 출신으로는 강영훈과 민기식(육참총장 역임), 학계 인사로는 권혁소(경희대 교수, 김삼수(숙대 교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위 사진 찢어지고 불에 탄 봉투는 2003년 1월 우이동 소원(素園)이 헐릴 때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것이다. 강영훈과 육당은 만주 건국대학 시절의 인연이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강영훈의 계급이 ‘육군 중장’으로 나와 있는 걸로 봐 이 봉투는 1960년 연말에 보낸 연하장으로 보인다)
*** 정운현 형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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