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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아무도 읽지 않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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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인지도 모른다.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부식金公富軾 공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80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雖愚夫騃婦。亦頗能說其事。僕嘗聞之。笑曰。先師仲尼。不語怪力亂神。此實荒唐奇詭之事。非吾曹所說。及讀魏書通典。亦載其事。然略而未詳。豈詳內略外之意耶。越癸丑四月。得舊三國史。見東明王本紀。其神異之迹。踰世之所說者。然亦初不能信之。意以爲鬼幻。及三復耽味。漸涉其源。非幻也。乃聖也。非鬼也。乃神也。況國史直筆之書。豈妄傳之哉。金公富軾重撰國史。頗略其事。意者公以爲國史矯世之書。不可以大異之事爲示於後世而略之耶。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삼국사기

 
 
백운거사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古律詩가 수록한 동명왕편東明王篇 병서(幷序) 앞 구절이다. 읽은 시점을 규보는 계축년이라 했으니, 이는 고려 명종 23년, 1193년이라 그가 26세 때 일이다.

젊은 나이에 구삼국사를 빌려다가 읽었다는데, 그냥 득구삼국사得舊三國史라고만 했지, 그것을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입수하게 되었는지는 아쉽게도 더는 증언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이래서 좀 시시콜콜히 적어놔야 후세가 고생을 덜한다. 하긴 그리 다 밝혀놓으면 후세 역사가가 할 일이 뭐 있겠는가? 

이 증언은 삼국사기와 구삼국사가 소비하는 양태 일면을 보인다는 점에서 대서특필해야 한다. 왜냐면 고려시대 저들 사서사 소비된 양태의 증언이 더는 없어 오직 저뿐이며, 그런 사정은 고려시대에 견주어서는 남은 문헌도 비약으로 많은 조선시대 들어서도 변화가 없는 까닭이다. 

간단히 말해 삼국사기는 아무도 읽지 않았다. 구삼국사는 더 수요가 적어 마침내 아주 종적을 감추고 말았으니, 책이 살아남은 제1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수요다. 찾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문헌의 생존을 결정한다. 

이규보가 구삼국사를 만나는 통로가 이채롭다. 그는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고는 동명왕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가 나중에 어떤 계기로 구삼국사를 얻어서는 동명왕본기를 읽게 되었다고 한다. 반대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삼국사기를 찬진하면서 김부식이 한 말을 증언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의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이르기를


지금의 학사나 대부大夫들은 오경五經과 제자諸子의 글, 진한秦漢 역대의 역사에는 혹 두루 통하여 상세히 말하는 자가 있어도 우리 동방의 일에 대하여는 도리어 그 시말始末을 까마득히 알지 못하니 심히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이에서 이규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종실록 37년 임인(1542) 7월 27일(을해)에는 행 부사과行副司果 어득강魚得江이 상소上疏가 수록됐으니 그에 이르기를 


또 우리 나라 사기史記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경주慶州에서 간행하여 그 판板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고려사절요》는 주자鑄字로 찍어 반포하였는데 이를 본 유자儒子가 드뭅니다. 근세에 서거정徐居正이 사국史局을 총재摠裁하고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하였는바 매우 해박할 뿐더러 주자로 찍어 반포한 것인데 역시 세상에 보기가 드뭅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의 사론史論과 권근權近이 쓴 《고려사절요》의 사론史論은 문장이 간고簡古하여 지금 한 마디도 도울 수가 없으나 서거정의 사론은 김부식이나 권근의 사론보다 아주 못합니다. 이는 모든 글이 서거정의 손에서 나오지 않고 보좌하던 신진新進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아서입니다. 만일 중국 사람이 《동국통감》을 얻어서 본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의 문장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또 《동국통감》을 찍은 글자가 너무 자잘하니 지금 다시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사론과 문장을 다시 필삭筆削해야 합니다.

신이 유용장劉用章이 편집한 《신증송원통감新增宋元通鑑》을 보았더니, 옛 군현郡縣 이름 밑에다 반드시 현재의 이름을 쓰고 그 땅이 어디서 몇 리쯤 떨어진 곳이라고 쓰기를 한결같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같이 하여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지리地理가 일목 요연합니다. 이제 의당 이것을 본받아서 《동국통감》을 《송원통감》과 똑같이 상밀詳密하게 하고 주자鑄字로 많이 찍어서 국용國用으로 반사頒賜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사書肆로 보내 온 나라 사람 중에 우리 나라의 흥망의 역사를 모르는 자가 없게 해야 합니다.


뭐 볼짝없다. 아무도 안 읽는다는 뜻이다. 더구나 "만일 중국 사람이 《동국통감》을 얻어서 본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의 문장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고 하니, 한국사가 버림 받은 실상 이유는 딴 게 없고 읽은 만한 글이 없다 생각한 까닭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나는 스토리 혹은 콘텐츠의 힘이라고 본다. 단순히 한국사인 까닭에 버림받았다? 스토리가 없으니 누가 쳐다보겠는가? 

앞서 세조 2년 병자1456 3월 28일(정유)에는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 상소上疏하기를

 
무과武科 시험에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未便하니, 빌건대 《무경칠서武經七書》 외에는 《장감將鑑》·《병감兵鑑》·《병요兵要》·《진설陣說》 만을 강講하고, 문과文科는 《사서》·《오경》 외에 《좌전左傳》·《사기史記》·《통감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 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表·전箋을 시험하여 신자臣子로 임금 섬기는 글을 익히게 하고, 교조敎詔를 시험하여 군상君上이 영하令下하는 글을 익히게 하며, 종장終場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歷代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라 했지만 상소는 상소로만 끝났다. 여담이나 이 양성지라는 사람은 여러 부문에서 대서특필해야 한다. 그에 대해서는 훗날 다른 자리를 빌려 써 보겠다. 

이야기가 길어져, 또 출근 준비를 해야 하므로 일단 끊고자 한다.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유사는 더 형편없어 나는 이 두 책을 대할 때마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한다. 독자가 없던 이들 책이 어찌해서 살아남았을까? 

오직 국가도서관 공공도서관에 기대어 그 한 쪽 귀퉁이에 쳐박혀 있다가 용케도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때 출판은 찍어봤자 100부 남짓한 시대라, 발행부수도 많지 않았을뿐더러, 찾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용케도 살아남아 현재에 이른다.
 
이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살아남은 일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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