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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관덕정은 무슨 개뼉다귀인가를 답한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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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제주 관덕정을 안내하는 문화재청 설명을 질타하면서, 그 껍데기만 전면 몇 칸에 측면 몇 칸이냐는 놀음으로 일관한다면서, 정작 그 기능이 무엇인지는 함구한 일을 비판했거니와, 그렇다면 관덕정은 뭐하는 곳인가? 그에 답한다. 
 
묻는다. 제주 관덕정은 대체 뭐하던 개뼉다귀인가?
 

묻는다. 제주 관덕정은 대체 뭐하던 개뼉다귀인가?

어쩌다 제주 관덕정을 서칭하게 되었으니 그러다 문화재청이 제공하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마주했다. 보물 제주 관덕정 (濟州 觀德亭) Gwandeokjeong Hall, Jeju 제주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제주 관덕정

historylibrary.net

 
 
고려사절요 제11권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기사 3년(1149), 송 소흥 19년·금 해릉왕海陵王 천덕天德 원년에 이르기를 

(9월) 관덕정觀德亭에 거둥하여 군사를 사열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렸다.

이라 했으니, 이 관덕정은 말할 것도 없이 개경에 있던 정자지만, 그 기능이 군사 사열에 있음을 본다. 비록 사례 하나에 지나지 아니하나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것은 군사 사열을 염두에 둔 것임을 본다. 

 

쏘아라!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 글을 모은 사가문집四佳文集) 제2권 기記가 수록한 

제주濟州 관덕정觀德亭을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濟州觀德亭重新記]

가 있으니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좌주座主 남원南原 양 판상梁判相이 거정에게 말씀하기를, 
“우리 집 아이 양찬梁瓚이 제주에 목사로 있으면서 관덕정을 중수하였네. 선생이 기문을 지어 빛내 주기 바라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제주는 본시 옛날의 모라국毛羅國이니, 곧 우리나라 구한九韓 중의 하나이다. 신라 때에 비로소 조공朝貢하고 탐라耽羅라 일컬어졌다. 고려 초에 땅을 바치고 항복해 오니 나라를 혁파하여 현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말에 기 황후奇皇后가 그곳에다 임시로 목장을 설치하였고, 명나라 때에 다시 우리 조선에 예속되었다. 

대개 제주는 바다 안에 있는데, 땅의 넓이가 거의 4·5백 리이고, 사는 백성은 8·9천 호이며, 기르는 말도 수만 필이다. 그 물산이 넉넉하여 다른 군보다 두 배나 된다. 또 일본과 서로 이웃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할 방책을 세우는 일이 참으로 번잡하다. 그래서 조정에서 목사를 뽑을 때마다 적임자를 찾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 양후梁侯가 먼저 그 선발에 들어, 깊은 바다를 마치 평탄한 길을 가듯이 건너가며 조금도 집을 걱정하거나 연연해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양후는 훌륭한 인재로다. 관청에 도착해서는 부지런히 성상의 덕을 펴고 백성의 고충을 보살피는 일로 급선무를 삼으니, 다스린 지 3년 만에 사람들이 대화합을 이루었다. 

이에 그 지방 호족 고윤高潤 등 수십 인이 청하기를,

관덕정은 실로 제주 고을 사람들이 활쏘기를 익히는 곳입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부서져 활쏘기를 익힐 곳이 없으니, 우리 고을의 큰 흠입니다.

하니, 양후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통판 하공 주河公澍와 상의해 목재를 모으고 공인을 모아,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완성하였다. 이에 활쏘기를 익힐 장소가 있게 되어 무비가 더욱 엄해졌으니, 양공梁公은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아는 자라 하겠다. 

 

영디기보다 실력이 낫다

 

하물며 이 정자를 지은 것은 놀며 관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래 열무閱武를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 제주 고을 사람들이 날마다 여기에서 활쏘기를 익힐 것인데, 그냥 과녁을 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며 쏘는 것도 익힐 것이고, 말을 타고 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투의 진법陣法도 익힐 것이다. 그리하여 왜적의 침범이 있을 때에는 세 고을의 군대를 출동시켜 상산常山의 형세를 만들고, 바다와 육지에서 보병과 기병이 각각 출병하여 힘을 다해 싸워서 다투어 적의 목을 베어, 이로써 부모와 처자를 구원하고 이로써 한 고을을 보전하고 이로써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어 역사에 공명을 기록하게 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랴. 

단지 무비武備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곳 제주 사람으로서 문장과 사업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는 평장사平章事 고조기高兆基로부터 아래로 고득종高得宗 선생, 좌윤左尹 고태필高台弼 4형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신하여 청현직을 지내 이름을 떨쳤다. 기타 세 고을 젊은이들도 제주에 있을 때에는 공물을 바치는 일에 근실하였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숙위宿衛를 조심스럽게 잘하였으니, 그 풍속의 순후함이 육지의 여러 고을에 견줄 만하였다. 

양후는 명문가 후예로서 무사武事에 익숙하였고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우리 여러 군주께 인정을 받아서 잇달아 지방관에 제수되었다. 삼척三陟과 웅주熊州에 있을 때에 남긴 명성과 공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자자하게 칭송한다.

이제 멀리 떨어진 제주 지역에서 이름을 날려 그 세운 바가 이처럼 우뚝하니, 어찌 아름답게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양후는 자가 여옥如玉이고, 남원군 셋째 아들이다. 

경자년(1480, 성종11) 가을.


[주-D001] 양 판상梁判相 : 판서를 지낸 양성지梁誠之를 말한다.
[주-D002] 양찬梁瓚이 …… 있으면서 : 《성종실록》에 의하면, 양찬은 1478년(성종9) 8월에 통정대부 행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주-D003] 모라국毛羅國 : 《세종실록》, 《동사강목東史綱目》,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의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는 탁라乇羅, 탐모라耽牟羅, 담모라耼牟羅 등으로 불렸다.
[주-D004] 구한九韓 : 《동사강목》 부록 권상 〈고이考異 구이九夷〉에 《삼국유사》를 인용하여, “구한은 일본日本,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乇羅, 응유鷹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진女眞, 예맥濊貊이다.” 하였다.
[주-D005] 기 황후奇皇后 : 원나라 순제順帝의 비妃이다. 고려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다.
[주-D006] 세 고을 : 대본에는 ‘삼도三道’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전라도 제주목濟州牧〉에는 ‘삼읍三邑’으로 되어 있다.
[주-D007] 상산常山의 형세 : 양쪽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상호 보조하는 형세를 갖춤을 말한다. 《손자병법》, 《태평어람》 등에 나온다. 상산에 솔연率然이라는 뱀이 있는데, 머리를 치면 꼬리가 와서 덤비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와서 덤비며,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와서 덤빈다고 한다. 또는 솔연은 머리가 둘이 달린 뱀인데 한쪽을 치면 다른 한쪽이 와서 덤비며, 중간을 치면 두 머리가 함께 덤빈다고도 한다. 용병을 잘하는 것을 비유할 때에 쓰는 말이다.
[주-D008] 고조기(高兆基) : ?~1157. 초명初名은 당유唐愈이다. 경서와 역사에 달통하였고 오언시를 잘하였다고 한다.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주-D009] 고득종高得宗 : 제주 사람으로서 조선 초기에 승문원 교리, 예조 정랑, 예조 참의, 한성 부윤 등을 지냈다.
[주-D010] 좌윤左尹 고태필高台弼 : 고득종高得宗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조선 초기에 헌납, 청주 목사, 이조 참판, 전라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개성 유수開城留守 등을 지냈다. 좌윤을 지냈다는 것은 미상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9

 

 

이에서 보듯이 관덕정은 무예를 익히는 곳이라, 고려사절요에서 말한 같은 이름을 지닌 정자 기능과 같다. 이는 관덕정이라는 말이 붙으면 저런 기능을 겸한 곳이라는 뜻이다. 곧 일반명사이면서 고유명사다. 

그렇다면 그 유래는 무엇인가?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활쏘기는 진퇴進退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禮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안정되고 든든하며, 이런 다음에야 과녁을 맞힐 수 있다. 이래서 덕행을 보게 된다’  했으니, 바로 이에서 활 쏘기 하는 데를 관덕정觀德亭이라 한다. 

그러므로 제주 관덕정 안내문에는 이런 설명이 반드시, 모름지기 있어야지 무슨 씨잘데기 없는 칸 타령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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