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상소학교 입학통지서
소화 14년(1939년) 3월 당시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시) 숭인정(崇仁町, 현 종로구 숭인동) 65-1번지 살고 있던 김춘영(金春永) 씨는 그달 25일 아들 김상철(金相哲) 군의 심상소학교(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입학은 학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통지서 안내문에 따르면, 상철 군은 ‘사정(査定)’의 결과 허가를 받았으며, 4월 5일 오전 9시까지 보호자를 동반하여 등교하라고 나와 있다. 그에 앞서 보호자는 (3월) 2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본 통지서를 지참하여 학교에 들르라고 하였다.
구한말 이후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소학교, 1906년 이후에는 보통학교로 불렀다. 반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초등학교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고 불렀다. ‘심상(尋常)’은 ‘보통’이라는 뜻이다.
그러던 것이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이른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표방하면서 조선인, 일본인 구분 없이 초등학교는 모두 심상소학교로 통칭하였다. 이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었다.
1939년 3월 당시 상철 군이 입학 예정인 학교는 경성창신공립심상소학교(京城昌新公立尋常小學校). 심상소학교는 수업 연한이 6년이며, 소학교 졸업자가 입학하는 고등과가 있는 학교는 ‘고등소학교’라고 불렀는데 고등과의 수업 연한은 2년이었다. 상철 군은 심상과 1학년 입학 예정이었다.
2. 신사참배 상장
예정대로 창신심상소학교에 입학한 상철 군은 당시 일제 당국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였다. 상철 군은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그 인근에 있던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참배하였다.
당시 상철 군이 남달리 참배를 잘하였는지, 아니면 아이들 독려 차원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신사참배를 잘했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3. 창씨개명계(屆)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인적, 물적 병참기지화하였다. 장차 시행될 조선인 징병제에 앞서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겉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일본군 안에 김씨, 박씨 성을 가진 병사들을 없애려는 취지였다.
창씨개명은 일본의 ‘기원(紀元) 2600년’을 맞는 1941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6개월간에 걸쳐 진행했다. 성(姓)을 중시하는 조선인들이 창씨(創氏)를 거부하자 자녀의 학교 입학을 금지하거나 도항증(渡航證) 발급을 거부하는 등 불이익을 주면서 강요하였다.
그러나 기한(8.10)까지 창씨계를 제출한 사람은 전체 조선인의 80% 정도였다. 조선과 같은 식민지였던 만주에서는 이보다 못했다.
창씨개명은 상철 군 집안도 피할 수 없었다. 상철 군 아버지 김춘영(金春永) 씨는 김곡유성(金谷裕盛), 즉 가네야 하루모리로 먼저 창씨개명하였다.
그리고는 상철 군을 김곡부유(金谷富裕), 즉 가네야 토미하루로 창씨개명 한 후 상철 군 학교에 창씨계(屆)를 제출하였다. 제출 일자는 소화 16년(1941년) 6월 18일.
그런데 불과 2년 사이에 학교 명칭이 달라졌다. ‘창신심상소학교’가 ‘창신국민학교’로 바뀐 것이다.
1941년 일제는 황국신민(皇國臣民) 교육의 일환으로 모든 심상소학교를 ‘국민(國民)학교’로 개칭하였다. 이와 함께 학교 체제도 전시 체제에 맞게 개편하였다. 대표적인 일제 잔재인 ‘국민학교’ 명칭은 광복 51주년이던 1996년에야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4. ‘국민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 일과표'
‘가네야 토미하루’로 창씨개명한 그해 상철 군은 ‘창신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학교에서 ‘夏休み(여름방학) 일과표’를 나눠주었다. 그 속에는 당시 ‘국민학교 3학년’ 상철 군의 하루일과가 자세히 나와 있다.
행사(行事) 란을 보면, 남녀로 나뉘어 두 차례 원족(遠足, 소풍)을 다녀왔으며, 매달 1일은 애국일, 8일은 소집일, 10일은 대용식일(代用食日)로 나와 있다. 그리고 17일은 신사참배를 하는 날이다.
매일 아침마다 6시에 일어나서는 건포(乾布, 마른수건) 마사지, 궁성요배(宮城遙拜, 일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함), 라디오 체조를 하였는데 어떤 순서로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어 매일매일 주어진 교과 공부를 하고 또 묵도(黙禱)도 하였으며, 밤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나와 있다. 열 살짜리 아이가 과연 이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는 알 수 없다.
*** 정운현 형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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