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경성의전과 경성제대 관계는 묘하다.
원래 경성제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경성의전은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한제국 의학교가 나라가 망한 후 총독부 의학강습소로 바뀌었고
이것이 1916년, 관립학교인 경성의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성의전은 기초의학 2년, 임상의학 2년으로 이러한 커리큘럼은 필자가 대학 다니던 80년대까지도 그대로 였다.
(지금은 필자가 재학하던 때에 비해 임상의학 강의가 늘고 기초의학이 줄었다)
쉽게 말해 경성의전은 해방 후 예과 없이 본과만 있는 의대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의전이라 연한이 대학 의학부에 비해 짧지만 전문 교육은 둘다 4년으로 동일했다.
당연히 일제시대에도 의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러 경성의전에는 조선바닥의 수재는 다 모여들었다.
이것이 1924년부터 경성제대에서 예과생을 뽑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경성의전에는 조선의 수재들이 모여들었지만,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은 가르치는 수준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보면, 두 학교 사이에는 대학과 고교 과정의 벽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다.
예과 없는 의대는 사실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일본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톰으로 유명한 데쓰카 오사무는 오사카제대 의학부가 아니라 오사카제대 의학전문부생이었다.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중학교 (조선은 고보)를 졸업하고 진학했다는 대학 예과 아니면 의학 전문부, 라고 했던 바로 그 전문부이다.
이 전문부가 의학교육에도 있었고 그렇게 설치된 학교가 오사카제대 의학전문부다.
이 학교도 예과 없이 본과만 4년을 다녔으므로 데쓰카 오사무는 의사면허를 받았지만 여전히 "의학사"는 아니었다.
이광수의 "사랑"을 보면, 순옥이 안빈의 병원을 찾는데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安賓內科小兒科醫院’이라는 흰 뺑끼, 검은 글씨의 간판이 붙고, 다른 기둥에는 ‘醫學士 安 賓’이라는 칠도 아니한 나무쪽 문패가 붙어 있었다.
요즘이야 널린 것이 학사호라 흔한 것이 되었지만, 일제시대 당시만 해도 학사호를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의사들 중에도 "의학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조선바닥에서는 경성제대 의학부 밖에 없었다.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경성여의전 등 다른 전문학교 의과대학의 경우, 졸업후 의사는 될 수 있었지만 의학사호는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광수 소설에 나온 "안빈"은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등 출신은 아니며 경성제대거나 아니면 일본 유학으로 그곳 의대를 졸업한 사람이겠고 그 때문에 문패에 "의학사"호를 자랑스럽게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겠다.
이렇게 보면 경성제대와 경성의전은 좁히기 힘든 엄청난 격차가 있었을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 Editor's Note***
이광수 사랑은 1938년 출판이라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의사는 경성제국대학 의대 출신일 수 있다.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산은 감격 (0) | 2023.09.26 |
---|---|
경성의전-경성제대 이야기 (3) 큰 갈등이 없던 두 학교, 당대 최고 의료스타 백인제는 의전 출신 (0) | 2023.09.23 |
국립박물관 세계문화관 (0) | 2023.09.22 |
경성의전-경성제대 이야기 (1) 고졸과 대졸, 그 건너기 힘든 간극 (0) | 2023.09.22 |
현대사는 어떻게 과거를 역규정 하는가 (0) | 2023.09.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