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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고려거란전쟁 시기에 대한 생각

by 초야잠필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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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무신정변 이전이다. 

고려 거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이미 고려는 전시과 제도 체제 하에 있었다. 

고려거란전쟁에 동원되는 그 많은 고려군은 

뭘 먹고 살던 사람들일까. 

조선처럼 병농일치 병사들일까 

아니면 직역이 세습되는 병사들일까. 

고려는 무과도 없었다는데 

무과가 있었던 조선시대 군인보다도 더 잘 싸우는 저 고려의 무인들은

도대체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마지막 의문-. 

고려거란전쟁에서 저렇게 싸우는 군인들이 

결국 무신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싹슬이 해버린 군인들의 
직계 조상일까? 

만약 그렇다면 

거란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고려의 군인들이 

불과 백여년 후에는 그 칼을 문신들에게 돌려 고려 정부를 절단 낸 셈이다. 

거란과 고려의 통쾌한 전쟁사 이면에 

저 군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한 번은 생각해 볼 만도 하다. 
 

 
신(臣)이 듣기에 고려 왕성(王城)의 장위는 다른 군현들[郡]과 비교하면 가장 훌륭하다. 날래고 용맹한 군인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듯하다. 

중국[中朝]에서 사신이 오면 모두 나와서 영예로운 광경[榮觀]을 보여준다.

고려 제도에서는 백성들은 16세 이상이면 군역(軍役)에 충당되는데, 6군(六軍)의 상위(上衞)는 항상 관부(官府)에 머무르며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토지를 지급받고 자신의 생업을 부여받는다. 전쟁이 나면[有警] 무기를 들고 적에게 돌진하고, 일을 맡으면 역에 따라[執役] 복무하며, 일이 끝나면 토지로 되돌아가니 우연히도 옛 향민(鄉民)의 제도와 부합한다.註 002

원래 고구려[高麗]는 위진(魏晉)대註 003에는 호(户)가 3만에 불과했는데 당 고종(高宗)이 평양을 함락시킬 때는 거두어들인 병사의 숫자가 30만이었으며, 현재〈의 고려〉를 앞 시대와 비교한다면 다시 두 배로 늘었다. 왕성에 머물러 숙위를 담당하는 숫자가 항상 3만 명인데, 교대로 번(番)을 나누어 지킨다. 

병제(兵制)의 대략은 군(軍)에는 장(將)을 두고 장(將)에는 령(領)을 둔다. 대오(隊伍)에는 정(正)이 있으며 보열(步列)에는 등(等)이 있는데 나란히 6군(六軍)이 되니, 용호군(龍虎軍)·신호군(神虎軍)·흥위군(興威軍)·금오군(金吾軍)·천우군(千牛軍)·공학군(控鶴軍)이라 부른다.註 004 

〈이를〉 나누어서 양위(兩衞)가 되니 좌위(左衞)·우위(右衞)라고 부르고, 삼등(三等)으로 구분하니 초군(超軍)·맹군(猛軍)·해군(海軍)이라고 부른다.

경묵(黥墨)註 005하는 제도는 없으며 주둔하는 곳[營屯之居]도 없다. 다만 공적으로 사령하는 경우[給使]에는 의복으로 구분할 뿐이다. 갑옷은 위아래가 연결되어 마치 봉액(逢掖)처럼註 006 보이는데 이상한 모습이다.

금꽃으로 장식한 높은 모자는 거의 2자註 007[尺]에 이른다. 비단 옷에 푸른 포(袍)에 느슨한 띠는 느슨하게 매어 바지[袴]까지 내려온다.

아마도 고려인들은 선천적으로 키가 작기 때문에[侏儒]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으로 장식하여 그 용모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리고 명칭[名色]에 따라 뒤에 차례로 서술한다. (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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