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18세기 집정 서인 세계관의 대척점으로 숙종-영조-정조대의 황극론을 세우는데,
이 황극론에서 탕평책이 나왔으므로 함께 이해하여 서술한다.
황극론은 흔히 정조를 지목하지만 그 사상적 연원을 따지고 보면 숙종 이후 정조 때까지
이 대가 쎈 군주 세 명의 치세에 서서히 발전하여 정조 임금 때 최종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이 흐름의 이해에 있어 숙종과 영조도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다.
숙종, 영조 치세에 보면 정조 때의 사상적 흐름의 단초는 이미 충분히 많이 보이고 있어
정조 때에 완성된 황극론의 흐름에는 그 상류에 숙종과 영조가 당연히 포진하고 있다.
이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에 따르면
정조는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남인과 연대하여 소위 근대적 맹아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인데,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소위 지사들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양국 식자들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서구 세력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로 있었는가 정도로서,
정작 유교에 대한 입장 차이는 이들을 역사의 순류와 반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메이지유신 지사들도 충분히 18세기 조선의 서인과 같은 사고방식도 있었고,
또 황극론과 같은 입장도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조선의 황극론이야말로 한반도 근대화의 맹아를 대표하는 주자로서
정조의 죽음과 함께 19세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조선의 실패는
그런 사소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해석의 미묘한 차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작 제대로 된 근대화의 시발이라 할 서구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다.
서구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전개되는 왕과 신하 사이, 서인과 남인 사이 전개되던
사소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결코 근대화의 맹아와 이에 대한 반동 같은 거창한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국사의 근대화에 있어서 18세기는
그 전체가 반동의 세기이다. 위로는 왕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근대화의 맹아가 되는 이데올로기?
필자가 보기엔 당시 성리학자들 사이에는 실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없다.
그게 문제라는 말이다.
이걸 직시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20세기 후반의 발전은
18세기 이후 자생적으로 발전하던 기존의 근대화의 싹을 뭉개고 나가는 반동적 흐름이 되는것인데.
이를 확대시켜 보면
18세기 사대부들이 그리던 "혁신적 세계"가 해방이후 북한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는데 착목할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18세기 숙종, 영조, 정조대의 황극론,
무소불위의 절대적 유교군왕론의 그림자는
현재의 북한 정권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식자들은 장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8세기 정조의 황극론, 중농주의 실학자가 그리던 토지제도 개혁과 "새시대의 경제 시스템"은
20세기 중반 이후 북한 정권과 닮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18세기 #18세기르네상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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