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미술사를 공부하려면 좋든 싫든 일본 근대미술사도 보아야한다. 자연스레 일본의 대가大家들도 알게 되고, 그들의 작품이 어떠한지도 익히게 된다.
특히나 일본화日本畵 하는 작가들은 화풍의 변화양상이며 누구를 제자로 두었는지 하는 것을 알아둬야 한국 근대미술사를 넘나들며 공부하기 편하다.
그중에서도 양쪽에 꽤 자주 이름이 등장하는 작가가 있다.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
우리나라에서는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 수운首雲 김용수(1901-1934),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8)을 가르친 스승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남종문인화를 일본식으로 산뜻하게 재해석한 신남화新南畵의 개척자로 더 유명하다.
제자도 많이 두었고 일본 제국미술전람회, 문부성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여러 번 지내는 등 사회적 영예도 누렸다.
그는 1920년대 중국과 조선을 여행하며 그림의 수준을 높였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자격으로 몇 차례 조선에 온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명경지수>를 이왕가미술관이 1940년 구입했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내려온다.
그런 고무로 스이운은 산수와 화조에 두루 능했다는데, 사군자를 그린 건 거의 보지 못했었다.
도대체 그가 묵화를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하긴 했는데, 우연히 이 묵죽墨竹 한 폭을 보게 되었다.
이것도 인연일지 모를 일인 것이, 이 대를 쳐서 오오쓰大津라는 이에게 준 것이 무진戊辰년이다.
나는 1988년 무진생이다. 그러니 이 그림은 나보다 60년 전인 1928년에 태어난 셈이다. 고무로상이 쉰다섯살 때 작품이다.
의재가 만년에 그린 좀 거칠거칠한 대나무와는 달리 매끈매끈한 느낌이다. 언뜻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의 대나무 느낌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쩐지 화면에 힘이 없고, 특히 오른쪽 아래 댓잎이 너무 축 처진 느낌이 나서 명작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글쎄, 그의 다른 사군자를 더 보아야 알겠지만, 이 작품만 보자면 말 그대로 여기餘技로 그린 선물용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대가의 솜씨라고 다 명품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 와 닿는다.
붓 아래 구름이 있다[筆底雲煙]는 유인遊印의 내용을 생각하면 더욱이 살짝 아쉬운... 화제畵題를 읽어보고 글을 맺겠다.
一溪流水玉涓涓 시내 흐르는 물 옥이 쭐쭐 내리듯
溪上脩篁接暮煙 시냇가 마른 대숲 저녁 안개 닿았네
誰倩能詩文與可 누가 문동文同 시 잘함 아름답댔나
筆端移得小江天 붓 끝에 작은 천하 옮겨놓았다오
금대金代의 시인 원호문(1190-1257)의 <묵죽 세 수墨竹三首-격계의 부슬비隔溪煙雨>라는 시다.
*** Editor's Note ***
저에 동원한 원호문 시가 절창이라 내친 김에 그의 시편 하나를 본다.
살구 가지 끝에 보이는 붉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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