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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고총고분, 그 환상의 타파를 위하여] (2) why를 궁구하지 않는 학문

by taeshik.kim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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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라는 학문은 암것도 아닌 걸 거창하게 요리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녔다. 무덤? 웃기는 소리들 하고 자빠졌다. 단순하게 접근해야 한다. by 여송은 

 

 

일전에 내가 한국고고학은 개돼지도 3년만 시키면 한다 했더니, 그걸로 많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고학도를 개돼지에 비유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작금 한국고고학이 하는 학문이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하는 거 맞다. 그것은 현상의 배열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 현상이란 개돼지도 3년만 교육하면 한다.


이번에는 그런 사례로 고분을 든다. 한국 고분고고학은 절대 다수 혹은 그 주류적 흐름이 양식 변화다. 고인돌 혹은 석관묘에서 옹관묘로 갔네, 목관묘로 갔네 목관으로 갔다가 목곽으로 갔네, 그러다가 석실분으로 갔네 어쩌네저쩌네 그러다가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고작 불교 영향 운운하며 화장이 많아졌네, 조선시대 와서는 주자가례 영향으로 회곽묘 회격묘가 많아졌네 어떠네 저떠네 하는 얘기 뿐이다. 이건 개돼지도 한다. 

 

금령총 발굴현장과 그 뒤편 봉황대무덤. 당시 신라 지배층 최고권력자들을 묻었을 이런 무덤은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한 놈이 너무 많은 묘지를 차지하는 바람에 금방 주변 국토가 공동묘지로 변해 버리며, 이 과정에서 민간 주거영역을 침범한다. 이 꼴로는 더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 


나는 앞서 고총고고학과 관련해 그것을 대표하는 신라 적석목곽분이 그 입지로 시내 외곽을 선택하면서 튀어나가면서 석실분으로 바뀐 것이 경제 효율 때문이었다고 했거니와, 이건 비단 신라 국토 내에서는 비단 경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런 흐름은 광범위하게 관찰된다. 다시 말해 지방에서도 각기 부부 봉분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목곽묘를 대신해 봉분 하나에다가 부부를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석실묘로 거대한 변동이 있었다.

 
한국고고학은 목관묘 목곽묘에서 석실분으로 변해갔다고 기술한다. 그래서 어쨌다고? 왜 변해야만 했는지는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래 물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가뭄에 콩나듯 그런 글을 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건은 여전히 한국고고학 고분 관심은 압도적으로 묘제의 변천 양상 자체이며, 왜 변해가야 했는지를 궁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주 쪽샘지구와 대릉원. 6세기 이전 신라 왕경의 거대 공동묘지다. 하도 시체가 많이 나오니 이 구역은 무덤이 바글바글하다. 더는 무덤 쓸 땅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외곽으로 무덤이 기어나갔다. 효율을 극대화하고자 무덤 방식으로 일부러 합장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꿨다. 


이상하지 아니한가? 경주 시내에서도 5~6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1봉분 합장 양상을 표상으로 하는 석실분으로 변해갔는데, 지방에서도 신통방통하게 그 흐름으로 따라갔다는 게?? 유행이 변해서???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와 더불어 그 일련의 흐름에서 모종의 권력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았느냐를 읽어야 한다. 국가의 개입을 읽어야 한다. 


왜 변했겠는가? 경주가 봉착한 똑같은 문제점이 신라 국토 각지에서 빈발했다. 전국이 아우성이었다. 묘지를 쓸 땅이 없었다. 동네 공동체마다 공동묘지로 쓰는 공간이 있었다. 대개 마을에서는 일정 공간 격리한 산 능선이었다. 대체로 볕이 드는 남쪽 기슭이었다. 한데 두 세기가량 이런 공동묘지에다가 우람한 봉분을 앞세운 1인실 봉토분을 쓰다 보니 좃댔다. 

 

대전국립묘지가 왜 생겼는가? 동작동국립묘지가 미어텨져서 생겼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주가 묘지로 미어터졌고 지방 역시 묘지로 미어터졌다. 신라의 4~6세기 지방 공동묘지 발굴양상 봐라. 걸핏하면 수백기다. 바글바글 붙어나온다. 더는 묘지가 쓸 데가 없어 중복되는 일도 허다하게 있다. 

 

나주 복암리 3호분. 봉분 하나가 공동묘지다. 왜 이렇게 만들었겠는가? 토지이용율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공동묘지 양상을 보면 희한하게도 경주에서 적석목곽분이 폐기되고 왕릉이 교외로 나가는 그때와 흐름을 같이해 소위 말하는 묘제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유행? 웃기는 소리다. 묘제를 바꾸라는 율령이 발동됐다. 이리 가다간 온 국토가 묘지로 변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작동했다. 똑같은 고민에 봉착한 조선총독부나 대한민국 정부가 화장을 적극 권장 혹은 강제하듯이, 그와 똑같은 정부 시책이 나왔다.

 

지증왕은 순장을 없애라는 율령을 반시했다. 지증왕을 끝으로 왕족의 시체가 외곽으로 튀어나간 게 우연이 아니다. 왜? 
이를 궁구하지 않은 채, 단순히 현상만을 나열하면서, 무슨 외래계 유물이 들어갔네 마네, 무슨 유리제품이 나왔네 마네, 그것이 어디에서 유입되었네 마네 하는 이 따위는 개돼지도 3년만 훈련하면 한다.

 

(2018. 1. 14)

 

나주 영동리고분. 무덤 방식을 바꾸니 무덤방 하나가 시체 처리장이 되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무덤인가? 간단히 말해 이런 무덤은 납골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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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로 무식한 놈들이 이대근이니, 이런 이대근들은 걸핏하면 핏대 세우고는 웃통 벗어제끼며 힘 자랑하거니와, 또 걸핏하면 도끼들고 장작을 패는 시늉을 하거나 오줌싸기를 해서 누가 더 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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