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SAYS & MISCELLANIES

고총고분高塚古墳, 그 오리엔트 환상특급을 폭파하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3. 11.
반응형

젤로 무식한 놈들이 이대근이니, 이런 이대근들은 걸핏하면 핏대 세우고는 웃통 벗어제끼며 힘 자랑하거니와, 또 걸핏하면 도끼들고 장작을 패는 시늉을 하거나 오줌싸기를 해서 누가 더 오줌발을 멀리 보내느냐를 자랑한다.

이만큼이나 무식한 고고학이 무덤이 덩치가 커고, 부장품이 많을수록 그에 묻힌 이는 힘이 그만큼 세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고총高塚고고학이 그것이다.

 

무덤이 커야 권력자가 등장한 지표? 



이 고총고고학은 한중일, 특히 한국과 일본에 팽배해 그런 고총고분의 등장을 권력자의 등장로 간주하는가 하면,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런 고총고분이 등장해야만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 state 단계로 접어든 증거로 간주한다.

이 고총고분을 대표하는 무덤이 경주 분지 일대에 밀집하는 4~6세기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다. 이 고분은 덩치를 표식으로 삼는다. 積石木槨이라 하지만 이를 살려서 그 성격을 더욱 세밀히 표현한다면 적석봉토목곽분이다.

이런 고분은 순식간에 등장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뭐 한동안 유행한 것처럼 말하지만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천년 역사에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무덤은 유행품이다. 무덤이 보수성이 강하다는 말, 지금도 고고학 개설 같은 데서 자주 보이는데 무식한 고고학도의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적석봉토목곽분은 크게 보면 주로 평지에 등장하거니와, 평지에다가 두둑을 쌓고는 그 복판쯤에다가 매장주체시설이라 해서 시체와 그의 각종 껴묻거리는 안장하는 관곽 시설을 나무로 짜서 만든 다음, 그 주변으로 자갈이나 강돌을 졸라 깐다. 이 단계까지만을 적석목곽이라 한다.

 

무덤이 커야 국가단계?? 



하지만 이걸로는 무덤 보호시설이 마련되지 않으니, 그 위를 온통 흙으로 갖다 디리부어 쌓아올리니 이렇게서 무덤은 비로소 陵 혹은 墳 혹은 邱가 된다. 그 묻힌 주인공이 왕이나 왕비 혹은 그에 준하는 최고급 인물이라면 산릉山陵이라 한다.

이 적석봉토목곽분은 외관이 장중해서 무엇보다 힘자랑하는 데는 제격이다. 덩치가 졸라 커서 황남대총이나 봉황대고분을 보면 진짜 졸라 크다. 이런 데 묻힌 놈은 힘이 세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외관이다.

한데 이런 적석봉토목곽분은 결정적인 흠이 있다. 첫째, 면적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 평지에다가 조성하다 보니, 산능이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해서 토지매입비가 많이 든다.

 

외곽으로 쫓겨난 왕릉들...돈 때문이었다. 경주시내엔 더는 무덤 쓸 공간이 없다. 토지보상비 졸라 들었다.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다. 



둘째, 그러다 보니 민원을 빈발히 유발한다. 자꾸만 만들다 보니, 민간 영역을 침범해야 하며, 강제 수용에 따른 민원과 불만이 폭발하고, 그것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까닭에 번번이 국가 혹은 왕실재정에도 적잖은 부담을 준다.

셋째, 뒤에 죽은 놈이 갈 데가 마땅찮다. 부부 혹은 일가족은 공동묘지를 조성해야 하는데, 적석봉토목곽분은 참으로 경제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봉분 하나에 여러 사람을 묻을 수 있는 석실분 같은 데 견주어서는 비효율적이며 비경제적이기 짝이 없다.

부부가 동시에 죽는 일이 거의 없으니, 부부가 죽을 때마다 각기 봉분을 따로 만드는 일이 여간 지랄 맞지 않다. 적석목곽분이 도입 초창기에는 보기도 좋았다. 힘 자랑으로 이보다 더 좋은 일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새 경주 시내는 이런 무덤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더는 묘지를 쓸 데도 없다.

좃댔다 싶었다. 지증왕 때까진 그런 대로 왕도 따로 쓰고, 그 마누라 연제 태후도 따로 썼는데 이젠 경주 평야에서 더는 쓸 묘지가 없다.

이제 우째야 대노? 할 수 없이 밖으로 기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법흥왕 이래 산릉이 중심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내가 팽창된 까닭이 아니다.

 

쫓겨난 왕릉 



이걸 많은 이가 시내 팽창에서 찾으나, 외려 정반대였다. 묘지가 생활영역을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고, 그것을 더는 수용할 공간이 없어 할 수없이 기어나갔을 뿐이다.

나아가 이렇게 기어나간 걸 두고는 이때야 신라 왕권이 비로소 소위 귀족 견제에서 벗어나 독재체제를 구축했다고 말하는 이가 의외로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 제법 있다. 다 개소리로 보아 대과가 없다.

오직 경제성 때문이었다. 돈 때문이었다. 석실분으로 대체된 것은 필연이었다. 봉분 하나에 남편 말고도 마누라도 한꺼번에 살처분 가능하니 이보다 더 좋은 시스템이 있겠는가?

무덤 덩치는 권력과는 하등 관계도 없고, 그것이 외곽으로 기어나간 이유도 권력과는 눈꼽만큼도 관계가 없다. 적석목곽분은 시대 흐름에 따라 폐기된 것뿐이다. 다음으로 황남대총 남북분 문제를 다뤄볼까 한다.


뭐? 북분이 여자인데 금관이라서 금동관 쓴 남편보다 신분이 높았다고? 장난치니? 

(2018. 1. 13)

 

 

*** following article ***

 

[고총고분, 그 환상의 타파를 위하여] (2) why를 궁구하지 않는 학문

 

 

[고총고분, 그 환상의 타파를 위하여] (2) why를 궁구하지 않는 학문

일전에 내가 한국고고학은 개돼지도 3년만 시키면 한다 했더니, 그걸로 많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고학도를 개돼지에 비유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작금 한국고고학이 하는 학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