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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광개토왕비는 장수왕의 친정親政 기념비

by 한량 taeshik.kim 2020. 11. 20.

2011년 11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자, 그 후' 특별전 개최와 맞물려, 그날 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나는 '광개토왕비,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라는 발표를 했다. 이 발표문은 이후 한국고대사탐구학회 기관지에 정식 논문으로 공간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광개토왕비

 



이에서 나는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이른바 광개토왕비에서 陵과 墓라는 글자가 엄격히 구별돼 사용되니, 전자가 광개토왕릉임에 견주어 후자는 이를 포함한 고구려 선대 왕릉 전반을 포함하는 왕가 전체의 묘역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비는 광개토왕릉이라는 단일 왕릉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고구려 전체 왕릉 묘역 수호를 위한 법령 포고비다.

둘째, 나아가 이들 왕가 묘역 전체 관리를 위해 광개토왕의 存時敎言에 따라 배치된 수묘인(守墓人. 묘지기) 330家는 중국 황제릉에서는 흔한 능읍(陵邑)의 일종이며, 그들 330家 중 220家는 포로로 충당하면서도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로서 110家를 충당토록 한 것은 이들의 반란 혹은 소요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광개토왕비

 



셋째, 광개토왕비는 건립시점이 광개토왕이 죽어 3년상을 치른 다음, 왕릉에 안장하는 바로 그날, 그러니까 장수왕으로서는 탈상하는 그날인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바로 이 시점에서 장수왕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직접 친정(親政)을 실시한다는 사실을 천하에 공포한 기념물이라는 점에서 이 비는 광개토왕비가 아니라 실은 장수왕비다.

고구려인들은 이 비가 광개토왕비라고 선언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비가 광개토왕 생전 업적을 장황히 나열했다 해서 광개토왕비가 불렀고, 부지불식간에 그 건립자 역시 광개토왕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점이 있다. 이 비를 건립한 때는 그가 죽은 다음이라는 사실이다. 더불어 그 건립주체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다.

 

 

비문

 


장수왕이 이 비를 비문에서는 마치 아버지 유언을 따른 것처럼 적었지만, 이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버지 유언이라 해서 아들이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장수왕은 아버지 유언을 빌려 이 비를 세웠다. 이 비를 통해 장수왕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문 독법의 핵심이었다.

광개토왕비가 광개토왕비가 아니라, 실은 장수왕비라는 내 주장은 그 근거가 타당하건 아니건, 광개토왕비 지난 100년의 독법을 깨는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주체를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으로 과감히 나는 교체했다.

(2017. 11. 20)

 

 

비문

 




역사에 정답은 없다. 그렇기에 그 독법讀法은 언제나 비판에 열려야 하며 또 깨져야 한다. 내 독법 역시 언젠가는 깨질 것이다. 그것이 현재 시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201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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