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문 안 발굴 양상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어 무엇보다 조선왕조가 건국하고 직후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문화층이 확인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니
이를 통해서 보면 경복궁을 포함한 주요 왕궁시설과 관련 도시시설 기반은 조선왕조 개창 이래 형성된 왕경 신도시라는 사실이 확실하다.
물론 그 이전, 예컨대 고려시대 흔적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나, 도시시설이라 할 만한 흔적은 여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해도 청자 쪼가리 몇 개를 건지는데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 현재까지 고고학이 드러낸 양상은 조선도읍 한양은 철저한 신도시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 이 사대문 안은 홍수와 범람 피해가 극심해서 비만 왔다 하면 해발 고도 낮은 곳은 걸핏하면 물이 들이쳐 그 퇴적 양상이 조선건국을 기준으로 하면 그 역사가 비록 600년에 지나지 아니하지만, 퇴적층이 매우 두터워 4~5미터는 기본이라, 조선전기 최하층을 확인하려면 대략 저 깊이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보는 현재의 건축물로 지하를 파지 아니한 것들은 조선전기 기준으로 대략 그때보다 4~5미터가 높은 지점에서 형성됐다는 점을 하시라고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양상은 북악 기슭에 자리 잡아 그런대로 홍수 피해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간주하는 경복궁도 예외가 아니어서, 저 정도 깊이는 아니지만 매우 두터운 퇴적 양상을 본다.
이와 같은 양상이 광화문 바로 밖 이른바 월대月臺라 해서 궁궐 정문 마당 광장 시설이라 해서 별다르겠는가?
이곳을 발굴 중인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좀전에 확인한 고종시대 문화층 일부를 걷어내 버리고 파고 내려가니 아니나다를까 임진왜란 이전 조선전기 문화층이 나왔다.
안 나오는 것이 이상하니, 그런 양상 자체는 하등 뉴스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찾았다고 할까?
월대를 복원·정비하겠다는 담대한 계획을 수립하고는 그래서 일단 그 밑이 어떤지 파보자 해서 파제기끼기 시작한 연구소에 의하면 고종년간에 만든 월대 아래층을 파고내려가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하는 성과를 냈다고 하는데
첫째 조선 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화문 앞 공간 퇴적양상과 활용양상을 확인했다는 것이고 둘째, 고종년간에 월대가 축조되기 이전에도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실록을 통해서만 간접 체험하다가 이번에 그 물적 증거까지 확인한 점이라고 한다.
글쎄 이것이 과연 성과일까 하는 의뭉함도 없지는 아니하나, 일단 파제낀 건 성과라고 포장해야 하는 숙명 혹은 압박이라고 나는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연구소가 제시한 광화문 앞 광장 활용 문헌 양상은 어떤가?
세종실록 권97(1442)에 이르기를 광화문 밖 장전帳殿에 왕이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았다 하니, 장전帳殿이란 임금이 거둥하는 임시 천막 정도로 보아야 하니, 햇볕 등등을 가리기 위한 시설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려시대 같으면 월대 자리에서 뭘 했겠는가? 축구 시합했다.
이어 같은 세종실록 1450년 치를 보면 광화문 밖에 채붕綵棚을 맺고 잡희雜戲를 베풀게 했다 하니, 이 채붕綵棚을 1.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일종의 장식무대, 2. 임금의 행차 때나 중국의 칙사를 맞이할 때 색실, 색종이, 헝겊 따위를 문이나 다리, 지붕 등에 내다 걸어 장식을 이르던 말 이라고 연구소는 말하는데, 이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채붕은 도교 의식에서 비롯하는 중요한 표식이다. 하긴 이걸 땅 파는 이나 역사학 하는 자들이 알 턱이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 해서 어떤 잡학사전에서 가져왔을 저런 해석이 썩 틀린 것은 아니다.
이어 중종실록 1539년 치에 왕이 광화문 밖에 이르러 산대놀이를 구경하고 한참 뒤에 들어왔다 하므로, 이로써 보건대 광화문 월대 일대가 광장이었음을 본다.
암튼 이번에 파제끼니 퇴적양상이 자연층 위에다가 조선전기 문화층(14~16세기)과 조선중·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을 거쳐 근현대도로층(20세기) 순으로 형성됐음을 확인했댄다.
구체로 보면 조선전기 문화층은 앞선 2007년 광화문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층으로, 이번에 발굴한 유구는 고종년간 월대 어도지御道址(이 무슨 개떡 같은 말인지?) 서쪽 기초시설 아래쪽 약 120㎝ 지점에 위치한 조선전기 문화층 가장 위쪽에서 확인했댄다.
방형(사각형) 석재 1장(76×56×25cm)을 중심으로 양쪽에 남북방향으로 돌을 한 줄씩 배치한 모습이다. 특이한 점은 방형 석재 중앙에는 지름 6cm가량 철제 고정쇠가 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뭐 보나마나 궁중 행사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차일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다. 현재도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 마당에서 이런 흔적이 그대로 노출하며, 사대부가 묘소 같은 데서도 매우 흔하다.
양쪽 돌렬 사이는 너비가 약 85cm로, 길이 20~30cm인 크고 작은 석재가 일정한 너비를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진댄다.
조사단은 이러한 석렬 흔적이 동쪽 어도지 아래를 판 지점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세트를 이루었음을 본다. 뭐겠는가? 왕이 오가는 길 도로 끄터머리겠지 뭐가 있겠는가?
조선 중기~후기 흔적은 조선전기 문화층을 일부 파괴하고 들어선 층위에서 확인되었는데, 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민가 흔적도 일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임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된 당시 사정을 엿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리 볼 수도 있겠다.
경복궁 영건일기를 보건대 광화문 앞 육조거리 정비와 관련해 ‘광화문 앞 민가 중 어로御路에 불필요한 것은 모두 철거하였다(1865년 윤5월 18일)’라는 기록이 있음을 참고하면 좋겠댄다.
이로 볼 적에 광화문 앞에서 고종년간 월대와 같은 광장은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깐 시설들이 들어서 있음을 추찰한다고 한다.
광화문 앞 월대 근방 발굴조사는 조사 기관이 좀 특이해서 그 바로 앞 앙코라 할 만한 데는 국가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원이 먹고, 그 양쪽 중 동쪽 의정부 일대 구역은 수도문물연구원, 그 반대편 서쪽 삼군부 자리는 한울문화재연구원이 맡아 했으니, 민간 기관 발굴은 아마 일찍이 끝난 것으로 안다.
그렇담 왜 월대 자리는 국가가 쏙 빼갔는가? 이곳을 발굴하고 정비해야 하니, 이런 구역을 민간이 맡기는 그렇다 해서 궁릉유적본부에서 이건 우리꺼!!! 하고 쩜을 찍어 가져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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