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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교양은 ‘조커’나 ‘쌍피’가 아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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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은 ‘조커’나 ‘쌍피’가 아니다

 

글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얼마 전 서울시내 모 서점에 갔다가 이곳저곳 하릴없이 둘러보다가 대학 입시용 코너 한 군데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곳은 각종 ‘정석 수학’ 참고서를 위한 자리였다. 하도 판본이 많아 그 중 두어 판을 골라 출판 내력을 보았더니 초판 발행이 1966년이었다. 반세기 전에 나온 참고서가 이토록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니, 이 기간 이에 견줄 만한 베스트셀러는 운전면허 수험서나 성서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것이다. 30년 전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더구나 인문계와 자연계로 나뉜 고교 교육시스템에서 인문계를 선택하고, 이에 발목이 묶여 대학이 개설한 학과 또한 절반은 지원 자격조차 없는 시대를 보낸 나에게 과연 이후 현재까지의 삶에서 수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아니, 오해를 줄이고자 수학의 의미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대표하는 수학 일반이 아니라 고교 시절에 그토록이나 교육 당국이 ‘논리적 사고’ 키우기를 운운하며 중요성을 억압한 수학 교육과 ‘정석 수학’이 대표하는 그 수학, 예컨대 확률이며 미분이며 적분이며 방정식이라고 범위를 좁혀 이런 수학이 과연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얼마나 필요한 교육이었는가? 일언(一言)으로 폐(蔽)하여 말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수학은 논리적 사고를 키워준다는 미명 아래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수학이 가하는 무수한 억압에 학생들이 신음 중이다. 나는 ‘논리적 사고’ 혹은 그것의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일이 교육이 표방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부인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수학을 잘 해야, 확률을 잘 풀어야, 미분을 잘하고, 적분을 잘 해야 논리적 사고를 키운다는 발상은 거부한다. 논리적 사고나 비판적 사고는 꼭 수학만 키우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학문에서도 빠뜨릴 수 없으며, 그런 다른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그것을 키울 수 있다. 덧붙이건대 지금 돌이켜 보니 나한테 더욱 필요했던 것은 미적분이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이었다.

 

자유칠과. Herrad von Landsberg의 12세기 Hortus deliciarum 그림

 

80년대 대학을 다녔으며, 이후 기자로 줄곧 일하는 나에게 오늘의 대학 사회 교양교육의 현황과 그 문제점을 짚어달라는 요청이 실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 현장을 떠난 지 너무나 오래이며, 더구나 그 현실에 대한 지식은 피상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육 당국자들에게 감히 묻거니와 나의 대학생활 당시 교양교육과 지금의 그것이 과연 근간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설립한 대학의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한 나의 대학시절은 교양이건 전공이건 ‘필수’의 시대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맛보기한 사회학이며 철학 등을 ‘교양필수’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수강해야 했으며, 심지어 이제는 벗어났구나 하며 만세를 부른 수학이며 화학 등도 ‘교양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그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수강해야 했다. 이에 더해 기독교 대학이라는 특성에서 ‘성서학 개론’은 피해갈 수 없었고, 채플은 비록 학점은 없었지만 ‘패스(pass)’를 해야 졸업자격이 주어졌다. 전공으로 돌아가면 학생에게 선택권은 전연 없다시피 해서 ‘전공필수’라는 이름으로 특정 교수가 개설한 특정한 과목은 반드시 수강해야 했으니, 그가 악명이 높으면 부디 하루빨리 정년퇴직을 해주거나 안식년을 맞기를 간절히 소망한 기억이 생생하다. 

 

묻고 싶다. 지금의 대학 교육은 이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이후 대학 사회가 요동을 쳐서 학과제가 학부제로 변모하고, 그에 따라 생존을 위협받은 대학 사회가 엄청난 변모를 겪은 사실은 잘 안다. 그에 덩달아 무수한 ‘필수’가 ‘선택’으로 바뀌었으며, 일부 학과는 생존의 위협을 받고, 실제 간판을 내린곳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에 따라 근자에는 다시 옛날의 학과로 돌아가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학부제 도입 당시의 아우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들 변화가 초래한 현상은 누구보다 대학사회가 생생히 체험했으므로 중언부언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나는 ‘필수’라는 압박에서 학생들을 어느 정도 벗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의 일면을 찾는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런 변화에 생존의 압박에 시달린 학과와 과목, 그리고 그 종사자 일부, 혹은 상당수가 ‘교양’으로 살 길을 틀었다는 사실이다. 학부제 도입 초기 얘기다.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로 A대학에서도 철학과는 심대한 타격을 받아 고사 위기에 몰렸다. 이 학과는 이런 위기를 ‘교양’ 강좌로 위기를 탈출했다. 성(性) 문화 교양 강좌를 개설하니 수강생이 몰려든 것이다. 반면 이런 변화에 맞물려 결국은 간판을 내린 학과도 적지 않다. 개중에는 다른 유사 학과에 통합되기도 했지만, 어떤 곳은 ‘교양학부’로 강제 편입되기도 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작금 한국 대학사회가 표방하는 ‘교양’이 이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퇴출되거나 막을 내린 학과와 전공자들의 도피처가 설파하는 학문이 ‘교양’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 곳이 어딘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종래에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성 문화 강좌가 바로 교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대학이 몇 곳인지를 묻고 싶다.

 

우리네 대학 교양 교육이 탑재한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교양을 마치 ‘조커’인양 취급해 주로 그 대학 교수 제자나 재단의 지인에게 강의 시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많은 줄로 안다. 나아가 이른바 학과 이기주의가 판을 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일부 학교에서는 전임 교수가 교양 교육을 맡겠다고 하면서도 개학 직전에 자기 제자에게 수업을 맡기는 변칙 운영이 이뤄지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적절한 강의 담당자를 찾지 못해 강의자도, 수강자도 지금금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교양강좌가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교육 당국에서는 교양과정에 대한 재편을 시도하는 제스처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소리만 요란했을 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는 무엇보다 ‘교양’이라는 개념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철학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이라는 지성사회에서 나는 교양이 ‘조커’도 아니며, 더더구나 고스톱판의 ‘쌍피’도 아니라고 본다. 

 

요컨대 교양은 덤이 아니며 나눠먹기 하는 빵 조각이 아니다. 교양은 앙코다. 

 

나는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은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때 나에게 정말로 시급했던 것은 영국과 미국의 역사 문화였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 정도였다. 목마른 사람 우물 판다는 심정으로 관련 책을 찾아 읽거나 아니면 인근 역사학 관련 학과가 별도로 개설한 관련 과목을 수강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애초에 그런 강좌도 찾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과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수강 자체도 원천 봉쇄되기 일쑤였다.

 

나는 영어영문학 전공자에게 영국 혹은 미국사가 ‘교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작금 각 대학이 개설한 교양강좌가 정말로 학생들을 위한 교양인지 심각한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공직사회를 필두로 한국사회 전반에 공급자와 수요자의 ‘쌍방향 소통’을 기치로 내건 곳이 많다. 그런 점에서 작금 대학사회가 개설하는 교양 강좌가 교양에 대한 철학이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쌍방향 소통에 기반을 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여 교수나 강사들의 밥그릇 챙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교양 강좌의 부실은 필연적으로 전공 강좌의 부실로 이어진다. 더구나 이미 우리 대학사회에서는 학과 체제에 이어 학부 체제도 무너지면서 교양 강화를 부르짖는 마당에, 종래 학과가 담당한 전공 교육 또한 대학원으로 실상 다 넘어간 마당에 체계적인 교양 교육 재편은 대학사회가 당면한 과제다. 

 

한국교양기초교육원 e-journal 《두루내》 2014. 01+02. vol.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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