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묘지명을 읽다가>
우리의 이규보 선생님은 돌아가신 분을 기리기 위한 글, 묘지명墓誌銘도 여러 편 지으셨다. 그 중 한 편을 읽어보자.
대개 하늘이 베풀어주는 데에는, 뿔을 준 자에게는 날개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비로 장원으로 급제하고도[龍頭選] 능히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공은 그렇지 않았으니, 이미 과거에서 1등으로 등과하고, 또 재상[黃扉]의 귀한 자리를 끝까지 밟았으며 거기에 더해 장수하여 슬프고 영화로운 일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자람이 없었으니, 이 어찌 이유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무릇 반드시 하늘이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가 있어서 비록 많이 취하게 하였을지라도 하늘이 베풀기를 싫어하지 않은 것이리라. ...
- 금의琴儀 묘지명 중에서
금의(琴儀, 1153~1230)는 무신정권기의 문신으로, 1184년(명종 14)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이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금학사琴學士의 옥순문생玉筍門生'이란 얘기를 들을 만큼 많은 인재를 뽑았다.
장원급제자가 오히려 높이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금의는 그 증명을 깨부수는 드문 사례였기 때문에 이규보가 특별히 강조할 만도 하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재미있게 느끼는 부분은 그 앞의 대목이다.
"대개 하늘이 베풀어주는 데에는, 뿔을 준 자에게는 날개를 주지 않는다"라...
<호모 사피엔스> 전시 준비에 참여하며 진화 공부를 약간 한 입장에서, 예전 분들도 어렴풋하게나마 진화의 개념을 알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 페친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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