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집을 읽다가>
요즘은 '별다방'에 가서 언제건 시켜먹을 수 있는 것이 '말차' 무엇무엇이다. 말차라떼, 말차 프라푸치노, 이젠 말차 슈패너에 말차 아포카토까지 나왔다나.
하지만 말차抹茶 곧 가루차는 그리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수확 몇 주 전부터 차광막을 쳐서 그늘에서 기른 찻잎을 말려 줄기와 잎맥을 떼고 가루로 만들거나, 떡처럼 만들어 말린 단차團茶를 떼어내 가루내어야하는데 그 공이 보통 드는 게 아니다.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마른 이파리를 가루내려면, 그 시절에 믹서가 어디 있나? 맷돌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맷돌에서 나온 찻잎가루를 완碗에 담아 물을 부어 젓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게 옛날 송나라 때 차 마시던 방법이었다. 일본 다도가들이 다완에 말차를 풀어 젓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까.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성종에게 "사사로이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功德齋를 베풀기 위하여 혹은 친히 차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혹은 친히 보리를 갈기도 한다 하니..."라는 쓴소리를 한 데서도 보이듯, 이렇게 맷돌로 차를 가는 방법은 꽤 일찍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다.
고려 차맷돌이 실제 유물로도 대여섯 점 남아있는데, 생김새는 우리가 아는 맷돌과 비슷하지만 좀 작고 훨씬 야무지게 생겼다.
우리의 이규보 선생에게도 차맷돌이 하나 있었다. 친구가 선물로 준 것인데, 퍽 열심히 차를 갈아 마셨던지 하루는 이를 두고 시를 한 수 읊어 그 친구에게 보냈다.
돌 쪼아 바퀴 하나 이뤘으니 / 琢石作孤輪
돌리는 덴 팔뚝 하나 쓰누나 / 廻旋煩一臂
그대 어찌 차를 마시지 않고 / 子豈不茗飮
초가집에 사는 내게 보냈나 / 投向草堂裏
내 유독 잠 즐기는 걸 알아 / 知我偏嗜眠
이것을 나에게 부친 게야 / 所以見寄耳
찻잎 갈며 푸른 향기 나오니 / 硏出綠香塵
그대 뜻 더욱 고맙소이다 / 益感吾子意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14, 고율시, "차[茶] 가는 맷돌을 준 사람에게 사례하다[謝人贈茶磨]"
차를 마시면 잠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예전 분들도 알고 있었다. 이규보도 그 효험(?)을 보았던가보다.
맷돌에서 '푸른 향기'가 나온다 했으니 아마 단차가 아니라 차광 재배한 찻잎을 썼던 모양으로, 고려시대에는 그게 좀 쌌을는지?
어쨌건 그는 그 맷돌을 써서 말차를 직접 만들어 마셨다. 그리고 그 후기를 이렇게 시로 남겼다.
그가 간 지 700여 년이 넘은 지금, 대시인이 팔뚝 하나로 찻잎을 끝없이 갈았던 그 차맷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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