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13]
예술작품의 경지에 오른 『사자의 서』 필사본 – 『아니의 서』
2023년 5월 개관하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이 『아니의 서』(Papyrus of Ani)의 정교한 복제유물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자의 서』 중에서도 그 정교함과 예술적 가치가 가장 뛰어난 필사본으로 평가 받고 있는 『아니의 서』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인쇄기술이 없던 고대 이집트에서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는 사본을 일일이 필사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때 의뢰자 혹은 문서 제작자는 총 192개 주문 중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주문을 취사선택할 수 있었으며 삽화 역시 의뢰자 기호나 문서 제작자 필요에 따라 선택되거나 제외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 필사본의 내용과 필사 및 삽화 수준은 천차만별이었으나 『아니의 서』(BM EA 10470,3)는 현존하는 『사자의 서』 중에서도 상형문자 흘림체의 뛰어난 필사 수준, 그리고 아름답게 채색된 삽화로 유명합니다.
신왕국 시대 제18 왕조(기원전 1550-1295년) 초기부터 삽화 수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각각의 주문에 대응하는 삽화가 그려지는 것이 표준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는데 당시에는 『네브세니의 서』(Papyrus of Nebseni: BM EA 9900,6)에서처럼 간단한 소묘선으로 그려진 후 채색 처리된 인물 사물로 구성된 삽화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의 서』가 제작된 제19 왕조(기원전 1295-1186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생생한 세부묘사와 화려한 색상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작품 수준 필사본이 제작되었는데 『아니의 서』 이외에도 『후네페르의 서』(Papyrus of Hunefer: BM EA 9901,3)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제20 왕조(기원전 1186-1069년)로 접어들면서 묘사와 색상이 제18 왕조에 비해 다시 단순화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삽화가 필사본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삽화를 그리는 서기관과 텍스트를 필사하는 서기관의 작업이 분업했으며 대개는 삽화가 그려진 후 텍스트가 기입되는 순서로 필사본의 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삽화와 그에 대응하는 주문의 위치가 맞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으나 『아니의 서』에서는 이런 현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네브세니의 서』 관련 링크: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Y_EA9900-6?fbclid=IwAR2mUM7omYU9B7jBFdepbDvIWUOpP4lqjvadMl4TjoUea8927ljM4Ljyzx0
『아니의 서』 관련 링크: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Y_EA10470-3?fbclid=IwAR0hyFvziFlYDEoRJHwRWTRoL8B9Ha7d-63jjHWMujZ4lx45Na1ChLKS3ww
『후네페르의 서』 관련 링크: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Y_EA9901-3?fbclid=IwAR1VguoMV7GSgNwdCL9aKggeKWKjsROCgedYYWnISUFcTlTzEPRJPNfYuxw
『아니의 서』는 오늘날의 룩소르(Luxor) 시에 해당하는 테베(Thebes) 서안에 위치한 아니(Ani)의 분묘에서 1888년 발견되었으며 영국의 이집트학자 E. A. 월리스 버지(Ernest Alfred Thompson Wallis Budge: 1857-1934년)가 현지 유물 거래상으로부터 매입하여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 인도했습니다.
1890년 이집트학자이자 박물관 책임자였던 피터 르 페이지 르누프(Peter le Page Renouf: 1822-897년) 주도 하에 『사자의 서: 영국 박물관의 아니의 서 영인본』(The Book of the Dead: Facsimile of the Papyrus of Ani in British Museum)이 출간되었으며 이어 1895년에는 버지가 『사자의 서: 영국 박물관의 아니의 서』(The Book of the Dead: The Papyrus of Ani in British Museum, the Egyptian Text)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재판(再版: reprint)을 거듭하면서 지금도 판매되고 있습니다[아래 관련 링크 참조].
버지가 정리한 『아니의 서』의 가장 큰 장점은 상형문자 흘림체 텍스트가 모두 수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번역과 해석은 한 세기 전의 것으로 수정과 업데이트가 필요한데 최근 간행된 재판본에는 근래의 학문적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니의 서』 단행본 관련 링크: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12222654
『아니의 서』에서는 이 장례문서 주인인 아니가 그의 아내 투투(Tutu)가 함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니는 테베(Thebes)와 아비도스(Abydos) 등지에서 신전 봉헌물을 관리하는 왕실 서기관이었는데 『아니의 서』에서는 “왕께서 사랑하시는 진정한 왕실 서기관, 모든 신을 위한 신전 봉헌물 담당 서기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한편, 투투는 신전에서 주로 사용되던 악기인 시스트럼(sistrum)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주부, 아문 신을 위한 신전 가인(歌人)”으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름 앞에는 당시의 관례대로 망자를 의미하는 “오시리스”(Osiris)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사자의 서』 주문을 정리하여 일련번호를 붙인 인물은 『사자의 서』를 독일(프러시아)의 이집트학자인 카를 리하르트 렙시우스(Karl Richard Lepsius: 1810-1884년)였습니다.
그가 확립한 체계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체계에 따르면, 『아니의 서』에는 태양신 찬가 오시리스 찬가 하토르(Hathor) 여신 찬가와 같은 찬가들, 그리고 심장을 보호하고 심장이 “최후의 심판”(Final Judgement)에서 망자에게 대적하지 못하게 하는 30B번 주문·“한낮에 밖으로 나가기 위한” 17번 주문·망자가 명계의 관문에 들어가기 위해 낭송하는 144번 주문·“개구의식”(開口儀式: Ritual of Opening the Mouth), 즉 망자의 입을 열기 위한 23번 주문·공기를 마시고 물을 부릴 수 있게 되는 59번 주문·“베누”(Benu), 즉 불사조(不死鳥: Phoenix)로 변신하기 위한 83번 주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니의 서』는 현존하는 『사자의 서』 필사본 중 가장 문헌학적 역사적 가치가 높은 필사본으로 손꼽힙니다.
화려한 색채와 꼼꼼한 세부묘사가 돋보이는 삽화와 유려한 상형문자 흘림체로 쓰인 주문은 고대 이집트의 뛰어난 문자문화와 필사본 제작 능력은 물론, 흥미진진한 장례풍습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문헌자료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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