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12]
고대 이집트의 필기 매체 – 상형문자의 기능과 서기관 문화
상형문자 체계를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표의문자(表意文字: ideogram) 표음문자(表音文字: phonogram) 의미한정사(意味限定詞: determinative)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들은 고대 이집트어의 단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던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보편적인 문자체계인 설형문자가 모음과 자음이 포함된 음절문자(syllabary)인 데 반해, 상형문자 체계에서의 표음문자는 – 후대의 히브리어 아랍어 등과 마찬가지로 – 자음의 음가만을 표기했는데 이런 방법은 “음차(音借)의 원리” 혹은 “레부스의 법칙”(principle of rebus)에 따라 그림문자(pictograph)로 시작한 초기 표의문자를 표음문자로 전환하여 사용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레부스의 법칙”을 간단히 설명 드리면, 그림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추상 개념을 나타내고자 할 때 현재 사용 중인 그림문자 중에서 그 개념을 의미하는 단어의 발음과 우연히 음이 같은 문자의 음가만을 빌려와서 해당 개념 혹은 단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추상명사 중 하나인 belief “믿음”을 그림문자로 표현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연히 음가가 같은 그림문자들을 조합해서 그 발음만을 재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벌”을 형상화한 그림문자 bee와 “나뭇잎”을 형상화한 leaf를 결합한다면 *bee-leaf ≈ belief와 같이 그 음가를 거칠게나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때 구현된 음가와 원래는 다른 대상을 묘사한 그림문자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그림문자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상형문자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집트어의 모든 음가를 재현할 수 있는 표준적인 문자체계로 발전했습니다.
표음문자는 다시 (1) 하나의 문자가 하나의 음가를 표시하는 1자음문자(uniliteral sign) (2) 하나의 문자가 2개의 음가를 표시하는 2자음문자(biliteral sign) (3) 하나의 문자가 3개의 음가를 표시하는 3자음문자(triliteral sign)로 구분됩니다.
고대 이집트어에는 약 25개 자음이 존재했는데 이들 자음은 모두 1자음문자만으로도 표기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관행과 전통을 중시한 이집트 서기관들은 언제나 1자음문자와 2자음문자, 그리고 3자음문자를 조합하여 음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2자음문자와 3자음문자가 사용될 때에는 이들 문자의 음가를 보다 정확하기 표기하기 위해 1자음문자를 “음가보조사”(phonetic complement)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일본어에서 한자의 일본어 음가를 해당 한자의 위나 옆에 작게 표기하는 데 사용되는 후리가나(振り仮名)와 매우 유사한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음가를 나타내는 문자들과 함께 해당 단어의 의미범주(semantic category)를 표시하는 의미한정사가 더해졌는데 의미한정사는 한 단어의 맨 마지막에 위치하여 단어가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울러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던 이집트 텍스트에서 의미한정사는 단어와 단어 사이를 구분해주는 표지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이처럼 상형문자가 복잡하게 조합된 단어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피부”(skin)를 의미하는 (1)번 단어는 모두 6개 상형문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동물의 가죽과 꼬리”를 형상화한 맨 마지막 문자를 제외한 나머지 문자들은 모두 표음문자입니다.
맨 마지막 문자는 의미한정사로서 “피부”가 “가죽” 혹은 그와 유사한 범주 안에 속한다는 것을 지시합니다. 의미한정사를 제외한 나머지 표음문자의 음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j-jn-n-nm-m.
(1)번 단어에서 두 번째 위쪽에 쓰여진 문자는 “물고기”(fish)를, “올빼미”(owl) 바로 앞의 네 번째 문자는 “도축용 칼”(butcher's knife)을 각각 형상화 한 문자들인데 이들이 바로 2자음문자입니다.
“물고기”는 jn “인”(IN)이라는 음가를, “도축용 칼”은 nm “넴”(NM)이라는 음가를 표현합니다. [모음이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약자음을 제외하면 자음과 자음 사이에는 “넴”처럼 가상의 “e”를 넣어 읽는 것이 학계의 관례입니다.]
이외의 나머지 문자들, 즉 “갈대”(flowering reed)를 형상화한 첫 번째 문자, “물결”(ripple of water)을 형상화한 세 번째 문자, “올빼미”를 형상화한 다섯 번째 문자는 모두 1자음문자인데 이 단어에서 이들 1자음문자는 모두 음가보조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2자음 문자의 앞뒤에 붙어 2자음문자의 음가 중 전부 혹은 일부를 표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따라서 문자를 읽는 데에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한 잉여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단어의 음가는 중복되는 음가를 모두 제거하면 jnm “이넴(INEM)”이 됩니다. 이것이 (3)번에서처럼 이집트학자들이 단어를 음역(音譯: transliteration)하는 방법입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이런 표기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난해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음가만을 순수하게 나타내고자 한다면 이 단어는 아래의 예시 (2)번에서처럼 1자음문자 3개로 간단하게 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이집트 서기관들은 이집트 문자체계가 그리스 자모로 대체될 때까지 1자음문자를 순수한 음성기호, 즉 알파벳으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모음이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문자로 표기되는 단어 사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기호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고, 둘째로 복잡한 상형문자 체계를 통해 문자습득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임으로써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알베르틴 가우르(Albertine Gaur: 1932년-현재)는 『문자의 역사』(A History of Writing)에서, “특권계급은 배타성과 현상유지에 의해 존속하는 존재이므로 서기는 이집트에서든 메소포타미아에서든 극히 보수적인 세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체계를 간략화한다든지, 서기라는 직업을 사회의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한다든지, 나아가 사회가 직업적 서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일 등은 애당초 그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고대 이집트뿐만 아니라 복잡한 문자체계를 보다 쉽고 합리적인 체제로 바꾸려고 했던 세종대왕(世宗大王: 1418-1450년)의 정책에 대한 조선시대 식자층의 저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 반포되는 것에 반대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미상-1445년)는 상소를 통해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최만리 상소문』, 60-67):
若行諺文 則爲吏者專習諺文 不顧學問文字 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 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만약에 언문(諺文)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누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곧 후진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이로써 말하기를, ‘27자 언문으로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으니 무엇 때문에 고심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구(窮究)하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 수는 28자인데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27자라고 했습니다. 한 글자가 빠진 것인데, 그 글자는 ㆆ입니다.]
여기서 상형문자 1자음문자로 표기할 수 있는 자음 수가 약 25개, 훈민정음 수가 27개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형문자와 설형문자(楔形文字)가 등장한 지 약 1,500년 뒤인 기원전 15세기에 처음 등장한 알파벳 체계의 문자 수 역시 대개 30개 내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사용하는 한글과 알파벳 같은 모든 음성문자들에게는 이처럼 “읽기 어렵고, 쓰기 어렵고, 배우기 어렵다”는 “3난(三難)의 문자”에서 보다 쉽고 참신한 문자체제로 거듭나는 역사의 변곡점들이 적어도 한 번은 존재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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