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문재인 시대 근대사와 관련한 주요 움직임을 아래와 같이 아주 간단히 정리했거니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즈음해 3.1혁명으로 격상하려다가 실패
2019년 11월 의열단 100주년 즈음해 약산 띄우려다 실패
2020년 청산리, 봉오동 전투 100주년 즈음해 무장투쟁을 띄우고 싶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김좌진, 이범석은 제껴버리고 홍범도 낙점
보다시피 2020년 청산리 봉오동전투가 백주년이라 해서 이를 기점으로 권력에 의한 홍범도 마케팅이 최고조에 이를 때라, 예서 왜 굳이 권력이 홍범도를 골라냈을까 하는 의구심이 증폭한다.
청산리전투 기준 홍범도는 55세 노땅이고, 김좌진金佐鎭(1889~1930)은 32세 실전 지휘관, 이범석은 21살로 실제 말타고 날아다녔다.
바로 이에서 김좌진과 이범석을 제끼고 오로지 홍범도로 올인한 행위가 짙은 정치색을 띤다.
내가 청산리전투를 국사교과서에서 접할 때만 해도 이 전투는 오직 김좌진으로 시작해 김좌진으로 끝난다. 실제 그의 행적 어디를 봐도 만주에서 피살될 때까지 나무랄 데가 없어 문약文弱한 한민족을 배신한 무장투쟁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철기 이범석李範奭(1900~1972)은 고보 재학시절에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를 무대로 항일독립활동을 전개했으니, 청산리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실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임시정부 광복군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역임한 전쟁영웅이며 정부 수립과 더불어 1950년 4월 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는가 하면 국방부 장관도 겸임했으니 이 훗날의 족적이 청산리전투에서 비롯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김좌진이 피살로 조기퇴진한 데 비해 철기는 그 족적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무엇보다 그 족적이 크다.
이런 둘을 제끼고 문재인 정부는 굳이 북한에서의 석연찮은 행적 때문에 결국은 미끄러진 약산 김원봉의 대타로 노땅 홍범도를 골랐으니 이런 흐름과 궤를 같이해 마침내 봉오동전투를 소재로 삼은 영화까지 2020년에 개봉함에 편승해 카자흐스탄정부와 협의해 그의 유해를 봉환하기에 이른다.
다른 이는 몰라도 우리는 문정부가 이범석을 버린 이유는 짐작한다. 그는 같은 우파였지만 현 야권, 저 시절엔 여권이었던 그 세력이 정신적 지주로 삼는 김구와는 대립하며 이승만 정부에 참여해 초대 국무총리와 초대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바로 이에서 이른바 인물 기념사업이 짙은 정치색을 지녔음을 새삼 본다.
그렇다면 김좌진은?
크로체가 그랬던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당시 집권세력이 김좌진으로 무엇인가를 포장하기에는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1930년에 피살되었고, 그런 까닭에 당시 집권세력이 공을 들인 북한과의 이렇다 할 접목도 없었다.
문정부의 역사기념사업은 그네들이 역사바로세우기 등등을 표방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이런 역사관과는 하등 관련이 없고 시종일관 북한문제에 집중했다.
이를 냉혹한 정치 이득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북한을 이용한 지지율 획득과 그를 통한 집권 연장을 꿈꾸었을 뿐이다. 내가 볼 때 김좌진은 북한과 연결할 만한 고리가 어디에서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범도는 간택되었다. 왜? 홍범도는 북한도 주시하는 인물이니깐.
다음 호에서는 죽은 홍범도을 두고 벌어진 계파별 정파별 권력별 시신 쟁탈전을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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