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무렵부터 발굴보고서 미간에 내가 각종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거니와 그에 굴복해 뒤늦게 나온 발굴보고서 중 조양동보고서가 기억에 남기에 이를 전한 당시 내 기사를 전재한다.
증언하건대 이 조양동보고서는 발간자가 김태식이다!!! 내가 협박해서 나온 것이다!!!
그 내력을 본다. 우선 아래 기사는 발굴보고서 1차분이 나왔다는 소식이다. 2000년 8월이다.
2000.08.30 10:18:23
경주 조양동 발굴보고서 21년만에 발간
(경주=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BC 57년 신라 건국 이전 경주 상황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조는 "일찍이 조선(고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이곳에 들어와 계곡에다 각기 6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혁거세는 이들 촌락을 통합해 신라 건국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이 확장에 나서게 된다. 종주국인 마한을 위협하더니 혁거세 재위 39년째, 그러니까 서기전 19년에는 마한 왕이 죽자 이를 기화로 마한을 멸망시키려고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기록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 이후 한국학자들도 가짜라고 몰아붙였고 신라 건국연대를 400~500년이나 깎아내렸다.
이럴 즈음 1977년 11월 경주 중심부 경주 평야를 벗어난 외곽지대인 조양동 627의 6 김문환씨 집 마당에서 아주 이상한 토기 수십점이 쏟아졌다.
깜짝 놀란 당시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은 79년 7월20일 이후 이 일대에 대한 본격 발굴에 들어가 1983년 1월13일까지 5차에 걸친 대규모 발굴을 벌였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시기적으로 조양동 유적은 기원전 1세기 이래 5~6세기에 걸쳐 있었지만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 건국 즈음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 이래 기원후 3세기 즈음 고신라 각종 고분 유적과 유물이었다.
이 유적이 처음 만들어진 연대 확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한시대 구리 거울과 함께 화려한 금속 문물과 토기들이 각종 고분에서 쏟아졌다.
조양동 발굴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신라 건국이 연대가 꼭 BC 57년은 아니라 해도 이 즈음인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유적임에도 어찌된 셈인지 발굴보고서는 미적거리기만 했다. 발굴보고서 비용이 없다는 희한한 이유 때문에 조양동 발굴보고서는 1차 발굴이 완료된지 21년만에, 최종 5차 발굴이 끝난지 17년 동안이나 늑장을 부렸다.
이 보고서가 마침내 최근 경주박물관에서 제1권이 우선 나왔다. 《조양동 유적 보고서Ⅰ》은 1979년 4월19일 이후 그해 5월5일까지 30여평에 대해 실시된 제1차 발굴 성과만 담았다. 나머지 2~5차 발굴 성과는 곧 발간 예정인 제2권에 담게 된다.
신라 건국과 대단히 밀접한 성과는 제1권이 아니라 2권에 들어있다. 1권에는 3세기 후반 이래 5~6세기까지 목곽묘와 석곽묘, 옹관묘 등 14기에 이르는 고분을 발굴해 확인된 각종 유물 1백80여점에 대한 발굴 성과가 들어있다.
하지만 1차 발굴 성과를 무시할 수 없는 게 이를 통해 고신라에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왕릉(급) 대형 적석목곽묘 뿐만 아니라 당시 경주 사회에 목곽묘와 석곽묘,옹관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데 있다.
또 1차 발굴 지역에서 확인된 유물과 유적이 2~5차에서 확인된 그 이전, 즉 기원전 1~기원후 3세기 다른 조양동 유적과 유물에 비해 오히려 수준이 대단히 떨어진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와 관련, 한병삼씨는 "서기 1~3세기대에 우월한 묘가 축조되다가 1차 발굴에서 주로 확인된 5~6세기대에 대형묘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은 신라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사진있음)
다음은 그에 대한 해설이다.
2000.08.30 11:09:10
<조양동 발굴이 주는 교훈>
(경주=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지금은 문화재청 운영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병모 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20여년간 한양대 박물관장으로 있으면서 철칙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발굴보고서는 무슨일이 있어도 빨리 내야 한다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있다.사실 김 총장이 주도한 20여건의 발굴 중에서 지금까지 발굴이 완료된 이후 보고서 발간까지 2년을 넘긴 경우는 없다.
발굴 보고서는 말 그대로 발굴 성과에 대한 보고이다. 유적과 유물은 특정 발굴단이나 고고학자 개인 소유물이 아니요 국가의 것이며 국민의 것이다.
보고서를 발간한다는 것은 발굴단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국가와 국민을 대신해 이런 곳을 파 보았더니 이런 이런 유물과 유적이 나오더이다 하는 보고서다. 말하자면 발굴보고서는 정부가 발표하는 국정보고서와 성격이 같다.
이런 대원칙을 모를리 없는 문화재청에서도 분명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발굴보고서는 발굴이 완료된지 2년 안에,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2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규정 대로라면 늦어도 발굴 완료 4년 안에는 보고서를 내야 한다.
하지만 김병모 총장처럼 보고서 발간 시한을 지키는 학자나 기관은 `아주' 드물다. 인력이 없다느니, 유물 분석에 시간이 걸린다느니,보고서 발간 비용이 없다느니 여러가지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보고서 발간에 늑장을 부리기 일쑤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21년만에 나온 경주 조양동 유적 발굴보고서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대목은 보고서를 내야 하는 발굴기관이 사립도 아니요, 국립기관이라는 점이다.
물론 박물관측에서도 할 말이 많다. 명색이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나 상징성이 크다는 경주박물관에 학예사가 5명이 지나지 않고 다른 할 일도 많다. 또 보고서 발간 비용이 예산에 책정되지 않았고 그동안 이 유적 발굴에 관여했던 많은 인사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퇴직했다는 이유도 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1년 동안이나 발굴보고서 발간을 미뤄도 된다는 변명이 될 수는 결코 없다. 늑장 보고서는 역사에 대한 능멸이다.
보고서를 빨리 낼 자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발굴을 맡지 않았어야 했고 발굴허가 기관인 문화재청(옛 문화재관리국) 또한 발굴허가를 내주지 말았어야 했다.
뒤늦게 이런 심각성을 알아차린 문화재청은 최근들어 보고서 발간을 법이 규정한 시간 안에 내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를 지키지 못한 발굴기관에 대해 어떤 처벌을 내리겠다는 조항을 만드는 데는 아주 인색하다.
조양동 유적 발굴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이른바 학자들의 양심이다. 유적과 유물은 특정 개인이나 발굴단 전유물이 아니지만 조양동 유적은 70년대 후반 이후 83년까지 계속된 이 발굴에 참여한 일부 인사가 전유물처럼 이용했다.
5차에 걸친 유적 발굴에 모두 참여한 한 인사는 박물관 재직시는 물론 퇴직 이후에도, 발굴보고서는 발간하지 않은 채 발굴 성과를 자신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에 마음껏 이용했다. 반면 신라 국가형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조양동 유적을 이용하려는 다른 학자들은 보고서가 나오지 않음에 따라 문제의 이 인사가 각종 논문이나 박물관신문 등지에 짤막하게 쓴 보고문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유적 발굴과 늑장 보고서 발간이 안고 있는 이런 여러 문제점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21년만에 보고서가 나온 조양동 유적 발굴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이렇게 해서 마침내 조양동 보고서가 완간됐다는 소식이다.
2004.12.04 07:00:20
경주 조양동유적 발굴 20년만에 보고서 완간
4세기 이전 초기 신라 실체 구명 중요 열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4세기 무렵, 경주 평야 일원에 황남대총으로 대별되는 거대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이 출현하기 이전에 신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참으로 오랜 의문 덩어리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지금의 경주에서 박혁거세가 건국했다고 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도무지 적석목곽분 이전의 신라는 흔적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갈증은 1970년대 말에야 경주 조양동 유적이 발견,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조양동 유적이 어떠했을까?
1977년 11월, 이곳 주민 김대환金大煥 씨가 주택 개축을 위해 기존 집을 철거하고는 집터를 고르다가 덮개와 받침대를 모두 갖춘 목이 긴 항아리인 유개대부장경호有蓋臺附長頸壺를 비롯한 유물 8건 22점이 출토됐다.
이 사실은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 한병삼韓炳三에게 알려져, 박물관은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1979년에 시작된 조사는 1983년까지 무려 5차에 걸친 대규모 발굴로 확대됐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필두로 고려시대 유적까지 긴 시기에 걸쳐 조성된 유적 77기와 다량의 유물이 확인됐으나, 단연 압권은 4세기 이전 초기 신라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사실이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곳에서는 적석목곽분 등장 이전, 즉,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 무렵 고분만 해도 목관묘 27기, 목곽묘 12기, 옹관묘 15기가 무더기로 확인됐다. 그 중에서도 더욱 압권은 조사단이 조양동 38호분이라고 명명한 목관묘였다. 기원전 1세기 후반 무렵에 축조되었다고 생각되는 이 무덤에서는 일광경日光鏡·소명경昭明鏡·사유경四乳鏡 등의 중국 수입품 동경銅鏡 4점이 출토됐다.
중국 수입품이 출토되었다고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그런 수입품을 출토한 무덤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축조됐다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그것이 경주 땅에 유입된 정확한 통로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에 이미 경주지방 거주집단은 중국대륙과 어떤 식으로건 교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무역이 이뤄진 시점이 삼국사기 등이 말하는 신라 건국시점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박혁거세를 필두로 석탈해, 김알지의 소위 신라 삼성(三姓) 시조는 모두 외부 도래인이다.
이 때문에 신라 초기사 연구에서 이 유적이 차지하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구정동이나 사라리와 같은 인근 지역에서 비슷한 시대 유적이 확인되기도 했으나 지금도 조양동 유적은 그 중요도에서 `절대강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발굴이었음에도, 어찌된 셈인지 그 발굴보고서는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발굴 종료 무려 20년이 지난 최근에야 완간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은 1차 조사(1979) 성과를 담은 《조양동유적Ⅰ》을 2000년에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2-5차 보고서 사진 편을 낸 데 이어 최근에야 그 본문편을 정리한 《경주 조양동 유적Ⅱ》를 냄으로써 마침내 무거운 짐을 덜게 됐다. <사진있음> (끝)
이 발굴보고서가 그냥 나왔는 줄 아는가? 그에 앞서 내가 어떤 압력을 가했는지 그 흔적들을 제시한다. 2000년 당시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협박했다. 왜 조양동 보고서 안내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기어이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아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국립박물관을 협박했던가? 다음 기사가 그 우뚝한 증언이다. 지건길 당시 관장을 협박했다. 왜 안 내느냐고.
2000.03.20 17:45:00
"조양동 발굴보고서 조속 마무리"
(서울=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지건길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0일 기원을 전후한 시기 초기신라 유물이 많이 나온 경주 조양동 유적에 대한 발굴보고서를 조속히 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 관장은 이날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직후 잠시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조양동 유적이 발굴이 끝난 지 20년 가까이 지나도록 보고서가 나오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장 재직시절 조양동 유물정리 작업 책임자이기도 했던 지 관장은 "조양동 유적은 그 중요성에 비춰볼 때 벌써 발굴보고서가 나왔어야 했지만 인력이나 예산 부족 등 여러가지 이유로 보고서가 늦어지고 있으며 이런 문제는 비단 조양동 유적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것으로 안다"면서 "발굴보다 어떤 면에선 유물정리가 중요한 만큼 조양동 유적을 비롯해 그동안 미뤄진 발굴보고서를 조속히 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조양동 유적은 지난 80년대 발굴결과 신라국가 형성과는 떼놓고 생각하기 힘든동경과 토광목곽분 등 기원전후 시기의 귀중한 유물들을 다량 출토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지금까지 발굴보고서는 물론 유물 분류 작업도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이 유적은 한국고대사학계 대다수가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기원전후~서기 300년경 초기백제가 풍납토성을 통해 강력한 고대국가로 되살아 나듯 신라가 국가다운 국가가 된 시기를 기껏해야 서기 300년쯤으로 보는 한국고대사학계 통설과는 달리 그 기원을 삼국사기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쯤으로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지 관장은 또한 지난 78년 경주 안압지 발굴결과 한국 목간으로는 처음 나온 통일신라시대 목간이 발굴 20여년이 지나도록 육안 판독 외에 다른 과학적인 방법을 통한 판독시도가 없는데 대해 "그동안 목간판독기술이 발전했고 중앙박물관에도 보존과학실이 있는 만큼 과학적 방법을 통한 재판독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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