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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이 있기까지 이 사람 이름을 뺄 수 없다. 선문대 이형구 선생이다. 며칠 전에도 열정적인 발표를 했다.
툭하면 화형식을 당했고, 툭하면 발굴현장에 갇혀 오도가도 못했다. 세 시간 컨테이너박스에 감금 당하기도 했다. 나는 잘 빠져 나와 그 박스 근처를 어슬렁이면서 담배를 피웠다.
안다. 이 양반 모시기 힘든 거 누구나 안다. 성정은 참으로 지랄맞아, 요즘은 연세 들어가며 더 그런 증세가 농후하다.
하지만 이런 미친 사람이 있어 풍납토성이 있다. 그의 미침에 비하면 내 그 미침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인가 풍납토성에 그의 흉상이 제막할 그날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내 세대가 아니면 후세는 하리라. 그것은 단순한 흉상이 아니요, 어떤 미친 놈의 흉상이라 내가 만약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그리 쓸란다.
풍납토성은 단순한 토성 이상이다. 풍납토성은 피와 땀이다. 그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만신창이 되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부둥켜 안고 지켜낸 그 무엇이다.
내 세대에 지구 멸망이 와도, 나는 이 풍납토성만큼은 끌어안고 죽을란다.
기자 김태식을 두고 이런저런 말 많을 줄로 안다. 그것이 무엇이건, 풍납토성에 미쳐 풍납토성에서 날뛰다가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뒤진 놈이라고 묘지명을 미리 써 둔다.
(2017. 12. 4)
***
지금 읽어보니 후반부가 요상하게 되고 말았다. 이 글을 쓴 날 기분이 좀 그랬나 보다고 나를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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