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595~673)은 생전에 왕위에 있는 적이 없음에도 신라 하대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봉되었다.
그의 직계 후손이 왕이 되었다면, 이런 추봉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음에도 신하였던 그가 사후에 대왕으로 추봉된 것은 파천황의 사례다.
나는 이 대왕 추봉이 산신에 대한 대왕 책봉, 혹은 무속에서의 대왕 추봉과 비슷한 맥락에서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중요한 것은 대왕으로 추봉되면 이제는 이름을 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시점에 대해서는 흥덕왕(826∼836) 때라는 삼국사기와 경명왕(재위 917∼924) 때라는 삼국유사 두 가지로 갈라진다.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역시 이 두 가지로 갈라진다.
이 중에서도 어느 쪽이 더 타당한가?
나는 흥덕왕 때임을 지적했거니와, 신김씨新金氏의 등장 때문이다.
이를 결정화하는 자료가 있다.
대왕으로 추봉되면 그 왕조에서는 그 사람을 이름으로써 부르지 못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으로 '중화삼년仲和三年' 명銘 사리기가 있다. 이 사리기는 중화 3년, 헌강왕 9년(883)에 석탑을 중수하면서 봉안한 것이다. 한데 그 명문에 김유신이 등장한다.
昔有裕神角干, 成出生之業, 爲□國之寶....
이에서 김유신을 이름을 불렀다 해서 언뜻 우리는 이때 김유신이 대왕으로 추봉된 단계가 아니다. 그러니 이보다 훨씬 지난 경명왕 때 흥무대왕이 되었다고 간주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할 점이 있다.
김유신은 金庾信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裕神'이라고 썼다.
이 두 글자가 음을 빌린데 지나지 않는다.
한데 빌린 글자를 봐라
두 글자 모두 극존칭이다.
소위 피휘避諱다.
유신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해서, 김유신이 중화 3년에 흥무대왕이 아니었다고 할 수는 결코 없다.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으므로, 일부러 다른 글자로써 대체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 흥무대왕이라 불렀다면 깔끔하겠지만, 그의 관위를 각간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어 할 수 없이 저 방식을 쓴 것이다.
이건 내가 직접 논문에 썼는지 자신은 없지만, 김창겸 선생은 이걸 써먹었다. (2016.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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