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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2) 정부의 심장을 겨눈 전임 국립박물관장

by taeshik.kim 2021.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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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끈한 김재원

 

중앙일보 1974. 11. 18 | 종합 4면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의 손으로 저 고분을 파헤쳐서 그 안에서 보물이 나왔다고 신문이 떠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가 얻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경주의 고분은 학자들에게는 벌써 그렇게 학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지 오래다. 왜? 경주 고분의 구조와 부장품은 이미 국내외에 잘 알려진 까닭이다. 일제 때인 1920년대에 우연히도 발견된 금관총은 그 규모나 부장품으로 보아서 제1급의 고분이었다. 그러나 그 고분이 발견될 때까지는 분의 형태가 완전히 파괴되어 그야말로 조그마한 잔해만이 지상에 남아있어 과연 고분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도로확장공사 중에 그 부장품이 드러남으로써 관계사들이 당황하여 사후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 천마총 발굴조사단. 가운데 흰 모자를 쓴 이가 김정기


이때 마지막 처리를 한 것이 빈전경작濱田耕作(하마다 고사쿠-인용자, 이하 같음)과 매원말치梅原末治(우메하라 스에지)의 두 경도대京都大 교수이다. 우리는 그들의 보고서를 통하여 지금도 경주시 내외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의 구조와 유물의 일반을 알 수가 있다. 다만 금관총은 우연한 발견이라 처음부터 주도한 학적學的 발굴을 하지 못하였다 하여 완전한 고분을 일부러 발굴조사 한 것이 서봉총이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왕릉은 곁에도 못 가던 그들이 한국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고분을 파헤치는 데는 일부 일본학자들의 비판도 받았으나 어떻든 금관총에서 밝히지 못한 미지의 사실들을 밝힐 수가 있었다.


해방 후에도 경주 지방에서 발굴이 시행되었으나 그것들은 전부 이미 봉토가 없어진 것들로서 손을 대지 않으면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서 발견된 유물은 대체로 금관총·서봉총과 역시 파괴된 고분이었던 식리총과 금령총에서 발견된 유물 이외에 특별히 놀랄 만한 새로운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의 발굴에서 이때까지에 알려진 사실보다 더 많은 새로운 것은 기대되지 않는다.

 

(2018. 2. 2) 

 

***

 

1975년 7월 3일,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정희랑 박근혜. 맨 오른쪽이 당시 국립박물관장 최순우다.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본궤도에 오르고, 그 일환으로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하는 경주지역 고고학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온통 언론의 관심이 그쪽으로 향하자 이 사태가 본인들한테는 일대 위기임을 감지한 부류가 있었으니, 기관 자체의 존립 위협으로 감지한 데가 바로 국립박물관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국립박물관에 무혈입성하고는 그 수장 자리를 꿰차고 1970년 정년퇴임 때까지 장기집권한 김재원金載元(1909~1990)은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 했으니, 그런 그가 이 민감한 시기에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하는 문화재업계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 저리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1973년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은 박정희. 그 오른쪽이 김정기 

 

이 사태를 받아들이기 힘든 다른 한 쪽은 대학이었다. 각종 발굴조사라는 이름으로 간헐적으로 정부가 던지는 떡고물을 받아먹고 했던 대학, 특히 대학박물관들은 문화재관리국, 특히 그 산하 문화재조사실이 경주발굴을 독점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호시탐탐 정부를 공격하던 기회를 노리던 대학은 김재원이 정부를 저격하기 시작한 저 무렵, 새파란 고려대 교수 김정배를 내세워 공격에 나섰으니, 이 사태에 대한 소개와 해설 분석은 아래글을 참조하라. 

 

국가 주도 발굴에 대한 대학의 반란

 

 

국가 주도 발굴에 대한 대학의 반란

첨부사진은 보다시피 1976년 7월 12일 월요일판 경향신문 2판 제5면 머릿기사로 실린 김정배 기고 시론이다. 시론이란 간단해 말해 시사 문제와 관련한 논설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신문이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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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에서는 조금은 벗어나지만, 결국 저와 같은 대학들의 공격은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 경주발굴에서 마침내 떡고물 몇 개를 얻어먹게 되었으니, 그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 자리를 마련한다. 

 

김재원이 당시 정부 주도, 더욱 정확히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조사실 주도 경주발굴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까닭은 저 김재원 기고문에서 그 의도가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물관은 이후 어찌되었을까? 박물관 역시 경주발굴 떡고물을 몇 개 챙겼으니, 이에 대해서도 추후 기회를 엿보겠다. 

 

이런 공격이 어떠한 의도를 지녔는지를 당시 문화재관리국이라고 모를 리 있겠는가?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으로 이 사업을 시종해서 주도하면서 훗날 문화재관리국장까지 역임하게 되는 정재훈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다음호에 계속) 

 

 

*** previous article ***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1) 마침내 칼을 빼고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1) 마침내 칼을 빼고

박정희 정권이 1971년 수립하고, 이듬해에 본격 추진하기 시작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한국고고학 지형을 바꿔 놓았으니, 다른 무엇보다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국가주도 발굴이 확실한 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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