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보문단지를 그때 만든 다음 그후 조금씩 건물을 더 지어서 지금처럼 조성한 것이다. 원래 정부의 제안은 보문단지 호숫가에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전부 산쪽으로 붙여서 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호텔 등에서 호숫가로 가려면 찻길을 건너야 할 뿐더러 결국 호수와 멀리 떨어진 건물 일대의 땅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때는 내가 고집을 피워서 결국 지금대로 호숫가에 건물을 짓고 길을 건물 밖으로 내도록 했다.
호수를 다 파고 나서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 호수가 단순한(이상 238쪽) 위락용 호수가 아니라 농업 용수를 제공하는 호수이다 보니 정작 봄, 여름철이 되면 농사 짓는데 쓰느라 물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위에 다시 하나의 댐을 더 만들어서 물을 저수하기로 했다. 이때 저수지에 필요한 땅을 평당 평균 2백원씩 주고 수용했다.
천마총 등을 발굴해서 박물관을 만들자고 한 것은 일본의 유명 온천인 나가시마 온천의 경영자인 나가시마 사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내가 고집을 피워 시행한 것이다. 처음 고분을 발굴하자고 했을 때 정부에서는 펄쩍 뛰었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미 고적지를 개발해본 나가시마 사장의 이야기는 달랐다. '적어도 고분 두어 개는 발굴해서 박물관을 만들고 그걸 일반인들에게 공개해야 경주라는 유적 도시가 살아난다'는 것이 나가시마 사장의 지론이었다. 유적지인 고도 경주에 와봐야 아무 볼거리도 없이 그저 커다란 봉분들만 있는대서야 너무 싱겁다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고집을 피워서 천마총을 발굴했고 그 속에는 금관과 벽화가 나왔다. 지금도 나는 그때 발굴한 금관의 모형을 내 사는 집의 거실에 보관해 두고 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경주는 70년대 초반 그 뼈대를 갖추었다. 사람들은 뭐라고 평가를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당시 정부에서 경주 개발을 정권 홍보용 치적 내용으로 급하기 진행하지 않고 민간 기업들에 맡겨서 규모있게 경주를 개발했더라면 좀더 훌륭한 유적 도시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이상 239쪽) (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청산, 1993)
(2016. 1. 10)
***
이에는 무서운 폭로가 있으니, 다름 아닌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이 바로 이맹희와 그에게 제안한 일본 실업인 아아이디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맹희와 그 일본인이 훗날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명명하는 그 무덤들을 파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파라고 지시한 데는 따로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증언을 부릅뜨고 봐야 하는 것은 저와 같은 큰 무덤 두 곳을 파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한일 경제인 아이디어라는 대목이다. 저들 무덤 실제 발굴책임자인 창산 김정기 박사 회고록을 보면 누가 저런 무덤을 파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언급이 보이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맹희였다.
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경주 분지 중심 고적 발굴조사정비와 보문관광단지 조성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거니와, 저에는 보문단지 개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이맹희가 말한 또 다른 상류 댐이 바로 덕동댐이다. 내가 저 기술을 접하고는 부러 덕동댐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도 했다.
회고록이 이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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