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古의 일필휘지

김호진 계용묵의 제주 족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8. 25.
반응형



광복 후 한동안 제주의 거의 유일한 신문사였던 '제주신보' 사옥은 지금의 칠성로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 시절 분위기가 그러했듯, 제주신보도 진보적 색채가 강했지요.

그 신문사 편집국장 이야기 하나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4.3이 한창 불붙던 시기, 편집국장의 친구가 지나가다 제주신보사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국장은 신문사 인쇄기로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찍어내고 있었다는군요. 서북청년단 사무실로부터 60걸음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음에도요.

대경실색한 친구가 만류했음에도, 그는 "산군들의 부탁이야"라며 태연하게 인쇄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 편집국장은 뒷날 계엄사령부에 잡혀 수용소- '농업학교 천막'에 들어왔다가 고문 끝에 총살당합니다. 그의 이름은 김호진金昊辰이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100여 걸음 걸어가다보면, 탁본을 떠야 할 것 같은 표지석 하나가 나옵니다. 읽어보니 <백치 아다다>, <병풍에 그린 닭이>, <구두> 같은 글로 유명한 작가 계용묵桂容默이 6.25 당시 이곳 제주에 피난내려와 '아지트'로 삼았다는 동백다방 터라고 하는군요.

그는 3년 반 남짓 제주에 머물면서 많은 제주 사람과 교류하고 특히 문예계에 큰 영향을 드리웠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피난을 왔는데, 여기서 아들을 결혼시킵니다. 그때 이 동백다방을 예식장 삼아 테이블 위에 양과자를 두고 조촐하게 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도 평안도 선천 사람이던데, 바로 근처에 있던 고향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을지, 들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서청 사무실을 사이에 두고,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두 지식인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제주에는 비가 내립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