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김단장께서 연구보고와 수준있는 학설과의 차이를 이야기 하신 적이 있지만,
물론 이 이야기는 분명히 맞는 이야기겠지만 연구보고 이외에 제대로 쓴 학술 논문이라 해도 자연과학분야에서는
논문 한편에 변죽만 두드리다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 논문은 확고한 증거에 입각한 내용만 fact로 인정되기 때문에
조금만 이에서 이탈하면 사독과정에서 이에 대한 삭제를 요구하거나
그게 아니면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가설에 불과함을 고찰에서 분명히 밝히면서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수십 수백 편 논문이 쌓여도 연구자 주장의 큰 그림이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개 이러한 엄격한 사독 과정에서 벗어나 있는것이 대개 단행본인데,
단행본은 사독이 생략되거나 어느 정도 가볍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단행본 챕터에서는 연구자가 원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개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역시 정도의 문제일뿐 전체적으로 근거를 무시한 논리의 전개는 엄중히 배제됨은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수백 편 논문을 남겨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큰 그림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 분야 이외의 분야에서는 이러한 점을 생략하고 논문을 쓰기 때문에
큰 그림을 보다 그리기 쉽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분야이건 논문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이건 자연과학이건 사회과학이건 의학이건 간에
확고한 증거 없이는 fact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자가 인문학적 연구기법을 택한다고 해서 자기 상상을 맘대로 펼칠 수 있는 일종의 까방권을 획득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연과학적 연구기법과 인문학적 연구기법은 둘 사이에 보완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적 기법으로 어느 정도 추정 가능한 결론을 자연과학 그 자체만으론 결국 변죽만 두드리다 끝날 가능성이 많은 것이
인문학적 기법을 동원할 때 그 변죽만 두드리던 답답함이 해소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이다.
필자는 앞에서 썼듯이 Wet Lab 연구자 30년의 연구 동안 약 250편 정도의 영어권 논문을 출간하였는데,
전술한 답답함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이대로라면 250편 아니라 350편, 500편의 논문을 쓰게 된다고 해도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큰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필자 60대 연구에 대한 고민은 이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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