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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 홀로 맑도다. 온 세상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도다."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
전국시대 말기, 기울어가던 초나라를 걱정하며 멱라수에 풍덩한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 그를 후대 사람들은 존숭하고 또 사모했다.
이에 굴원의 작품뿐 아니라 같은 시기 사람들의 작품, 굴원을 본떠 지은 후대인의 시문을 모아 선집을 만드니 그것이 바로 <초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문학의 한 전범으로 여겨져 널리 읽혔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남송의 주희朱熹가 엮고 주석을 붙인 <초사집주>가 유행했다. 근대 이전 조선에서 간행한 <초사>는 (임란 전이건 후건) 거의 100% 이 <초사집주>일 정도다.
이는 물론 주자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주희의 위상이 절대적이었고, 그 집주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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