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探古의 일필휘지

야호 유배 끝났다, 신나서 한라산 오른 면암 최익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0. 9.
반응형


<면암 최익현, 한라산에 오르다>

조선시대, 제주로 건너와 한라산 정상에 오른 이가 적지는 않았으련만 기행기를 남긴 이는 열 분도 안 된다. 그 기행기 중에서도 특히 명작으로 꼽히는 것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다.

수능 국어 고전문학 지문으로도 출제되었을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 오늘날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거두이고 대마도까지 끌려가 순국한 지사로 기억되는 면암이다.

그런 만큼 그의 글도 성리性理를 논하는 거대한 담론에 그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세세한 데까지 그의 눈길이 닿아있고 트여있음에 놀라게 된다.

<유한라산기>도 그런 글이다.

1875년(고종 12) 봄, 2년 남짓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된 면암은 이 참에 한라산을 올라보기로 한다. 여러 날 걸려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굽어보고, 제주섬을 발 아래 둔 감상을 면암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핍박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 일본)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바다를 본 자는 다른 물이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泰山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 하였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7-1101))에게 그 시절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제어하고憑虛御風 /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羽化登仙"는 시구가 적벽赤壁에서만 알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만 읽어도 한라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정경이 눈앞에 화악 떠오르는 것만 같다. 면암은 그 감동을 품에 안고 제주 적거지謫居地로 돌아오면서 한라산이라는 산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대개 이 산은 백두산白頭山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천 리를 달려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또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 리를 건너 추자도楸子島가 되었고 다시 5백 리를 건너서 이 산이 된 것이다.

이 산은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에서 일어나 동으로 정의현旌義縣에서 그치고 중간이 솟아 절정絶頂이 되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2백 리이고 남북의 거리가 1백 리를 넘는다. ...

이 섬(인용자 주: 제주)은 협소한 외딴섬이지만 큰 바다에 우뚝 선 기둥이며, 3천 리 우리나라의 수구水口며 한문捍門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산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음식 중에 임금에게 진상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나온다.

공경대부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쓰는 물건과 경내 6, 7만 호가 경작하고 채굴하는 것도 이곳에서 자급자족한다.

그 이택利澤과 공리功利가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에게 관광거리나 주는 산들과 함께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남쪽 끝 제주, 면암은 그 섬의 복판에 높이 솟은 한라산에 올랐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경치에 감탄했으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라와 백성에 이 산, 이 섬이 얼마나 큰 이로움을 주는가의 문제까지 짚고 있는 면암.

맹자는 "어찌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오직 의로움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지만, 백성에, 나라에 이로움이 없다면 그것이 큰 의미가 있겠는가 -

면암은 바람부는 한라산 꼭대기에서 이를 비로소 느꼈는지도 모른다.


*** 편집자 주 ***


이 글을 보구선 대뜸 면암이 자기 발로 올랐는지 가마 타고 올랐는지가 궁금해 강군한테 문의하니 같은 글에서 아래 대목을 찾아 상납한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살펴보라고 했더니,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심한 편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갔다가 후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칠팔은 되었다.

나는 억지로 한 잔의 홍조(紅潮 술인 듯함)를 마시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돌길이 꽤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를 갈아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와 바다의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二成)을 시켜 돌려보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가는데, 주인 윤규환(尹奎煥)은 다리가 아파서 돌아가기를 청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작은 길이 나무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조금의 형태는 있었지만,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서 더욱 위태로웠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러자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씨가 좋다고 하므로 나는, “이 산을 중도에서 가고 가지 않는 것이 모두 이들의 농간에서 나왔으니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걸 보면 수십 명이서 움직였으며 면암은 말 타고 룰루랄라 오르다 도저히 남의 힘을 빌리기 힘든 데는 걸었음을 엿본다.

호연지기는 저 높은 산을 시종 걸어서 올라서는 기를 수가 없고 욕만 나온다.

호연지기는 마상馬上이나 남이 메주는 가마에서 나오는 법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