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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내가 본 박경식] (3) 정영호 몰래 문을 연 한백문화재연구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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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문화재연구원 홈페이지 제공 정보를 따라 그 개원에 즈음한 주요한 움직임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먼저 2005년 12월 2일 창립발기인 대회를 하고, 같은 달 14일 창립총회 및 이사회의를 하고는 이사장과 이사, 감사 등 정관 심의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 6일 개원을 하고, 1월11일 설립 등기를 완료했으며 3월 3일 성수동에서 개원식을 공식으로 했다. 문화재청 발굴조사 승인은 2006년 4월 12일에 났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인데, 이걸 준비하느라 서영일과 방유리가 똥을 쌌다. 

저 과정에서 박경식 형이 실은 나한테 이사로 들어와 주었으면 하고 의사타진을 했지만, 나는 현직 기자로서, 더구나 문화재 담당 기자로서 그건 곤란하다 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거 보면 나도 참 당시만 해도 원칙을 고수하는 기자였어 그렇지 않음? ㅋㅋㅋ

암튼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를 해체하고, 이제 본격적인 재단법인 한백문화재연구원이 출범하는 과정을 내가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하지만 대강 흘러가는 과정은 지켜 봤거니와, 이에서 심각한 현안이 있었으니 정영호 선생 문제를 어찌 처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2017. 2. 9 저녁 경주 황남맷돌순두부에서 정영호 선생. 두 달 뒤 그는 타계했다.

 
당시 나는 여러 번이나 정영호 선생을 어찌할 생각이냐 박 옹과 서영일한테 물었으니, 결론은 선생은 빼고 우리끼리 간다였다.

다만 나 역시 그랬으니, 저들이야 오죽 했겠는가? 완전히 빼고 가자니 역풍이 없을 수는 없음을 저들이 충분히 예상한 까닭이었다. 

예서 우리끼리 간다는 말은 한백문화재연구원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를 선생한테 알리지 않고 간다는 뜻이었다.

그런 방침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래도 사부신데, 만든다는 말을 미리 해야지 않겠느냐" 우려했지만, 또 다른 역풍을 저들은 우려했다. 

정영호 선생은 나 역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에너지가 대단한 분이었고, 무엇보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젊은 시절 럭비선수였는데, 그런 체력을 타계 직전까지 유지했으니 저런 분들이 일에 대한 욕심이 엄청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정영호 선생은 사양을 몰랐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제자가 "저희가 이런 일을 하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이사장을 맡아주시지오" 라고 고하면, 사부라면 모름지기 "그래요? 잘해 보시오. 늙은 내가 젊은 사람들 하는 일에 낄 수는 없소. 혹 내가 필요하면 조용히 힘을 보태겠소" 라는 정도로 덕담이나 해주고 빠져야 한다.

하지만 에너제틱 스트롱맨 정영호는 그런 타입과는 결코 거리가 멀었다. 

박경식과 서영일은 본능으로 알았다. 이사장 맡아달라 하면, 냉큼 그가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아예 한백연구원을 준비한다는 사실 자체도, 개원할 때도 개원한다는 소식 자체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박경식이 스승 정영호 선생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고, 한때 다시는 봉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진 원인 중에 분명 이 사건도 도사리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일들도 겹쳤다는 이야기도 언뜻 듣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내가 함부로 논단할 처지는 아니니 제껴둔다. 

아무튼 한백문화재연구원은 박경식으로서는 스승 정영호와의 관계 설정에서 실상 독립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정년퇴임 기념논총 봉정식에서의 박경식. 이날 행사장에서 온통 그는 정영호 선생 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일이 초래할 여파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여파는 생각보다 더 컸다.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 일은 단순히 박경식과 정영호의 관계로만 여파가 그치지 않았다.

박경식이 몸담은 단국대는 사립대라, 스승과 척을 진다는 것은 단국대 절대 권력 장충식 이사장(당시 총장이었나?) 눈밖에 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장충식-정영호는 관계가 돈독했다. 

사립대에서 재단과 관계가 틀어진다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박경식은 비로소 체감하기에 이른다. 그런 악화한 관계들 속에서 그의 속앓이는 내가 여러 번 보았거니와, 이 문제는 이 정도로 마감하고 다른 유쾌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가고자 한다. 

다름 아닌 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는 아예 발조차 담그지 못한 정영호 선생의 행보다.

그 자신의 기준에서는 어쩌면 믿은 제자들한테 팽 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정영호는 언제나 미술사학도를 자부했지만,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고고학 발굴현장을 떠날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건 그런 자리에 있어야 했다.

왜?

에너제틱 정영호는 그런 사람이니깐. 

한데 그런 그가 마음껏 그런 욕망을 펼친 무대가 따로 있었다. 

경주와 불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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