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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총사령관 임말리任末里를 희생한 김유신의 출세작 낭비성 전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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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시대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이후 신라는 서쪽에선 백제, 동북쪽에서는 고구려의 협공에 내내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반도의 이런 정세 변동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도 영향을 주어 수당 왕조가 한반도 문제에 깊숙히 개입하는 단초를 마련했으며, 백제는 바다 건너 왜와 결탁을 강화하니,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흔든 대사건이었다.

이 와중에 신라와 고구려는 629년 가을 8월, 낭비성娘臂城이라는 곳에서 국운을 건 일대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이 사건 전개를 삼국사기에서 훑어보면 먼저 신라 진평왕본기 51년(629) 조에 이르기를
 
“가을 8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


지금의 휴전선 일대 어딘가가 낭비성이다.


 
고 하면서, 그러다가 김유신이 불굴의 투지를 발휘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사건이 고구려 영류왕본기 12년(629) 조에도 남았을 것이니 이에서 이르기를

“가을 8월,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娘臂城을 빼앗았다."

고 간략히 기술했다. 아마도 그에 앞선 진평왕본기에서 상세히 기술한 까닭에 고구려본기에서는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고 말았지 않았나 한다.

한데 이 두 본기 기술이 극단적인 김유신 중심 기술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심지어 고구려본기에서는 낭비성 전투를 마치 김유신이 이끈 것처럼 묘사할 정도였다. 이때 김유신은 35살이라,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이나 대대장 정도에 지나지 않은 직책이었다. 이는 삼국사기 전반이 김유신 중심 사관임을 반영하는 보기다.

이 사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기술은 김유신열전(上)에서 발견된다.

“건복 46년(서기 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서현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했다. 그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내어 맞받아치자 우리 편이 불리해져 전사자가 매우 많았고 사기도 꺾여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유신은 이때 중당 당주中幢幢主였는데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저는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결심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 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더니 적장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군이 이를 보고 승세를 타 떨쳐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베어 죽이고 1천 명을 사로잡았다. 성 안에선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했다."

建福四十六年 己丑秋八月 王遣伊飡任末里波珍飡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衄 無復鬪心 庾信 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冑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蓋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迺跨馬拔劒 跳坑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낭비성 전투 당시 신라군 진영의 포진을 어느 정도 엿보게 된다. 신라본기만을 보면 이 전투를 이끈 신라군 총사령관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이라고 짙은 냄새를 풍기지만, 열전에서 보듯이 이 전투 최고사령관은 이찬 임말리였다.

임말리 아래 포진하는 부사령관들은 우선 관위가 삐까번쩍하다.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서현이 그들이다. 파진찬은 제4위요 소판은 제3위다. 이 기술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당연히 이 대목은 “소판 대인大因·서현,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순서로 기술해야 했지만, 관위가 낮은 용춘을 더 높은 서현보다 앞세웠다.

이는 그 토대가 된 원전에서 말미암는다고 봐야 한다. 신라본기와 열전 모두 김용춘을 앞세운 까닭은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인 까닭일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저 신라본기와 이 김유신열전은 원전이 태종무열왕 시대에 정리된 것이기 때문이다.

낭비성 전투는 여로 모로 중요성을 지니거니와, 개중 하나가 김유신 불후의 출세작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를 통해 김유신은 마침내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덧붙여 신라군 진용을 볼 적에 기라성을 방불하는 당대 최고 실력자들이 총동원됨으로 볼 적에 이 전투가 고구려 신라에서는 그야말로 국운을 건 일대 사투였음을 짐작한다. 이 전투에서 신라가 대승을 거두었으니, 김유신이 그에서 혁혁한 전과를 냈으니, 이제 시대는 김유신을 위해 활짝 열린 것이었다. 

(2016. 12. 13)
 
***
 
이런 중요성 때문인지 낭비성 전투를 주목한 논문이 많다. 개중 하나가 그 위치가 어디냐이거니와, 그와 관련해 모조리 무슨무슨 산성을 그럴 듯한 후보지로 지목하거니와, 저 전투 기술을 보면 낭비성은 산성이 아니다. 그건은 평지 대성大城이다. 그 평지 대성은 훗날 신라사에 견주건대 소경小京에 해당하는 도읍이다. 그런 데를 신라가 쳐서 빼앗은 것이다. 
 
낭비성은 예컨대 달구벌이나 국원國原 중원中原 같은 데라, 신라와 국경을 인접한 지역 평지에 입지한다. 김유신이 말을 타고 참호로 뛰어넘어 돌진했다지 않는가? 산성?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 낭비성은 당시 신라 고구려 국경 인접 지점 어디서 찾아야지 이미 신라가 장악한지 오래인 청주나 충주에서 찾는단 말인가? 언어도단이다.

경기북부나 황해도 혹은 철원 같은 강원도 북부 평야지대다. 산성은 죽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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