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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논어論語, 공자의 말씀? 시대가 원한 공자의 말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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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이 그린 공자(왼)와 주자



《논어論語》...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논어》는 사골국과 같다. 


이를 정리한 이들이 언제의 누구인지 말이 많거니와 이에 대해 오직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유자有子와 증자曾子만을 子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공자의 재전재자 그룹 중에서도 유자와 증자의 제자들이 정리했다는 설이 제일로 그럴 듯하게 통용한다. 


그렇다면  《논어》가 저록한 공자의 말씀은 실은 공자의 음성에서 한참이나 멀어졌으니 엄밀히는 유자와 증자를 통해 기억에서 살아남은 잔재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 엄밀히는 공자는 이미 뼈조차 삭아없어졌을 시기에 그런 스승들을 통해 겨우 살아남은 편린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이 평양시 낙랑구역 한 목관묘(木槨墓.귀틀무덤)에서 발굴했다는 사실만을 지난 1992년에 간단히 보고한 죽간논어(竹簡論語. 대나무 조각에 쓴 논어). 2009년에 비로소 실물이 공개된 이 죽간은 논어 중에서도 선진(先進)과 안연(顔淵), 두 편을 묵서(墨書)로 적은 텍스트로, 정백동(貞柏洞) 364호분이 출토지며, 정확한 출토량은 39매로 밝혀졌다. 2009.11.29 연합뉴스





이는 마치 부처의 말이 각종 경전에 의하면 입멸 직후를 비롯해 몇 차례 소위 결집이라는 형태로 정리가 이뤄졌다 하지만, 현재 우리한테 주어진 텍트스로 부처 당시 음성은 없다시피 하고, 백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나 겨우 종려나무 이파리에 저록해 정전正典이 되기 시작한 일과 견줄 수 있으니, 저  《논어》로써 공자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으리라. 


더구나 당시의 표기 수단은 죽간竹簡이 대세이니, 작금 우리한테 주어진 《논어》는 개뼉다귀 같은 느낌을 주는 데가 한두군데가 아니니, 얼마나 많은 착간錯簡과 오·탈·결·루誤脫缺漏가 있었을지 생각하면 실은 아찔하고 아찔하다. 


다행히 근자에  《논어》 죽간 혹은 백서帛書가 더러 발견되지만, 개중에는 목간木簡 혹은 목판木版 같은 것도 있지만, 그조차 그 텍스트가 생성한 공간을 보면 전한시대를 넘지 않고, 간혹 전국시대 것이 있기는 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가 주는 안전성을 담보하지는 아니한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 앞에 선 《논어》는 그 시대가 요구해 공자의 말씀으로 투영해 주물한 이상적인 인간상이라 보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2014. 3. 21)
 
***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가 텍스트로 완비되는 시점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기원전 400년 무렵이다. 물론 그 이전에 죽간 같은 데다가 그 편린들이 통용하고는 있었을 것이다.

이 편집 작업을 누가 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를 남상으로 삼고 증자 유자를 수학한 사람들 혹은 그런 개인이 이 작업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 문도 중에서도 가장 나이 어린 저들이 이미 가고 난지 한참이나 된 공자를 물고 늘어졌는지도 관심이거니와, 석가모니 부처 역시 그 무수한 말들을 유독 가장 나이 어린 아난이 정리했는지 그 일단을 엿보는 듯하다. 

장성한 제자는 독립, 것도 일찍 하기 마련이며, 그렇게 독립하고는 별도 문중을 만들어 나간다. 이에서 스승과 제자는 실은 관계가 끝장난다. 

왜 어린 친구들이 끝까지 스승을 챙겼을까? 그것이 생존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심리를 무엇이라 설명할지 모르겠다. 우리네 일상을 봐도, 흔히 대가라 지칭하는 사람들 문하는 분파가 아주 뚜렷해서 그 장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행동을 보면 겉으로는 스승을 들먹이나 실상 그네들만큼 스승의 단점까지 아울러 꿰뚫어 본 사람 없다. 

하지만 그 대가라는 사람이 상당히 노숙한 시점에 그 문하에 들어간 새파란 끄터머리 제자는 아주 달라서 말석을 차지하며 열심히 스승 말씀을 적어 금과옥조로 삼는다.

그 금과옥조가 실은 사기임을 알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라, 그 대가한테는 천만다행히도, 그 실상을 폭로하기 전에 죽어버린다. 

막내 제자한테 스승은 영원한 사표로 남을 완벽한 조건이 실은 구비된 것이다. 왜? 나는 스승의 인간다움, 곧 개차반 같은 면들을 보지 아니했으므로! (23. 3. 21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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