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쓴 바와 같이 필자는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읽을 때 《논어고금주》를 같이 놓고 읽는 방식으로 통독한 바 있다.
《논어고금주》에는 《논어집주》의 주자朱子 주註에 없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제목 그대로 고금주古今註, 여러 사람의 주를 다 모아 놓은 것이라 주자집주集註보다는 내용이 풍부하다.
정다산의 논어고금주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소위 말하는 한당漢唐의 주석가들이 달아 놓은 주석에는 자유로이 자신의 생각을 펴고 반박하는데 주자 주에는 거의 이설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산이 주자 주장을 논파하고 새로운 자신의 경학을 펴려고 헀다면 이를 위해 반박의 여지가 있는 주자의 주가 논어에는 수두룩하므로 여기서 주자의 주장에 거의 이설을 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다른 경학이라는 것도 사실 비슷할 것이라는 소리다.
이런 다산의 좋게 말하면 조심스러움, 나쁘게 말하면 양다리 걸치는 방식의 처신이라 보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여전론閭田論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여전론 원문은 이렇다.
今欲使農者得田, 不爲農者不得之. 則行閭田之法而吾志可遂也. 何謂閭田. 因山谿川原之勢而畫之爲界, 界之所函, 名之曰閭.【周制二十五家爲一閭, 今借其名, 約於三十家, 有出入, 亦不必一定其率.】 閭三爲里.【風俗通五十家爲一里, 今借其名, 不必五十家.】里五爲坊.【坊邑里之名. 漢有九子坊, 今國俗亦有之.】 坊五爲邑.【周制四井爲邑, 今以郡縣治所爲邑.】閭置閭長. 凡一閭之田, 令一閭之人咸治厥事, 無此疆爾界, 唯閭長之命是聽. 每役一日, 閭長注於冊簿. 秋旣成, 凡五穀之物, 悉輸之閭長之堂,【閭中之都堂也.】分其糧. 先輸之公家之稅, 次輸之閭長之祿, 以其餘配之於日役之簿. 假令得穀爲千斛,【以十斗爲一斛.】 而注役爲二萬日, 則每一日分糧五升. 有一夫焉, 其夫婦子媳, 注役共八百日, 則其分糧爲四十斛. 有一夫焉, 其注役十日, 則其分糧四斗已矣. 用力多者得糧高, 用力寡者得糧廉. 其有不盡力, 以賭其高者乎. 人莫不盡其力, 而地無不盡其利. 地利興則民產富, 民產富則風俗惇而孝悌立. 此制田之上術也. 與猶堂全書』第1集 第11卷 文集, 論, 田論3
이에 대한 설명으로 전술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여전론에 대한 설명은,
"여전론에서 이상적인 농업 생산의 형태는 공동 농장적인 농업 경영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얻게 하되, 봉건 지배층의 토지를 몰수하여 공동 소유⋅공동 노동⋅공동 경작⋅공동 분배함으로써 농민의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론 어디에도 이 국편위의 설명처럼 "봉건지배층의 토지를 몰수하여... 공동분배함으로써 농민의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내용은 없다. 이는 전적으로 국편위의 취향에 의해 추론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러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를 해방전후 시기 북한에서 시행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론에 대한 공감대에서 나온다고 본다. 잘알다시피 해방 이후 토지개혁이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남한에서는 유상몰수에 유상분배로 진행되었는데 이 중 전자를 정약용의 "여전론"에 투영했기 때문에 저런 해석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자. 정약용 여전론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무릇 1려閭의 토지는 1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고, 내 땅 네 땅 구분 없이 오직 여장閭長의 명령만을 따른다. 매 사람마다의 노동량은 매일 여장이 장부에 기록한다. 가을이 되면 무릇 오곡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여중의 도당】으로 보내어 그 식량을 분배한다. 먼저 국가에 바치는 공세를 제하고, 다음으로 여장의 녹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에 의거하여 여민들에게 분배한다."
정약용의 여전론에서는 여전제를 실제로 향촌에서 집행하는 사람을 "閭長"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여장이 과연 누구일까?
정약용은 그의 여전론에서 자신과 같은 향촌사회 사대부를 이 閭長으로 설정해 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토지를 공동 경작한다는 것은 정전법 이래 유교에서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이상적 토지소유관이었으므로 구태여 여기에 어떠한 형태의 혁명적 동기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거기다 그 여전을 실제로 작동하는 "여장"은 장부에 노동량을 기록하고 식량을 분배하고 국가에서 녹봉도 받는다. 이 사람들이 과연 누구일까? 당연히 향촌사회의 사대부이다.
향촌사회에 이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대부 말고는 없다.
이미 조선 중후기 조선 사대부는 향약과 사창제 등으로 향촌사회를 그런식으로 지배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결국 정약용의 여전제가 시행되면 결국 향촌사회 사대부들은 손해볼 것이 하나 없는 셈이다.
이전처럼 하며 여장으로 전업만 하면 되니까.
필자 생각으로 정약용의 여전론은 해방 이후 좌파 계열이 내세운 토지개혁론,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띄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전론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한 좌파 계열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는 애초에 아무 상관도 없다.
정확히는 유교 전래의 정전제에 기반한 토지공유개념과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지닌 사대부 역할을 뒤섞어 짬뽕을 만들어 놓은 데 불과하다는 말이다.
필자 시각으로 말한다면, 여전론은 참으로 그가 쓴 "논어고금주"와 같은 양다리 걸친 사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정약용의 여전론을 중세 사회를 혁신하는 근대적 토지제도로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개인적 의견이지만 여기에 피력해 둔다.
*** 편집자注 ***
필자는 시종일관 정약용이 대표하는 조선후기 이른바 실학파의 토지개혁론이 근대적 맹아와는 관계없고, 공맹 이래 유교의 전형적인 생각들을 반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누가, 어떤 시대 맥락에서 저와 같은 구닥다리 토지경영론을 근대적이니 하면서 침소봉대 역사왜곡했는가? 필자는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사회 한 켠을 지배한 사회주의 계열의 지배적인 생각들을 주목하면서, 그들이 저와 같은 공작을 단행했다고 간주한다.
한데 이 문제를 달리 볼 필요는 없을까?
그것은 유교 철학이 탑재한 내재성이다. 이 유교는 따져보면 마르크시즘과 전연 딴판인 듯하나, 그 폭력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절묘하게 상통한다. 막시즘을 근대로 보는 한, 다산의 해묵으면서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저 주장은 근대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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