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과 과전법 체제가 당시 전국적 규모로 강고하게 시행된 국가적 경제제도라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에는 "토지의 사적소유가 결핍"하였고 이 때문에 20세기 전 조선의 토지제도는 일본사에서 그러한 공전제公田制가 관철되던 "헤이안시대"에 준한 것이라는 주장을 낳아 오랫동안 "한국사정체론"의 근거로 쓰였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쓰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간단히 쓴다.
1. 전시과 과전법 체제로는 고려 조선시대 경제사를 규명 불가능하다. 전시과 과전법 체제가 500년을 사이에 두고 거의 비슷한 모양의 토지제도가 왕조 초창기에 등장한 것은 이 제도 자체가 당시의 토지의 소유관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전시과 과전법 체제는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를 운용하는 중앙관리의 녹봉, 공신전에 지급할 토지 등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 낸 토지제도다. 따라서 전시과 과전법 체제는 전국적 규모로 시행된 바 없다.
형식상 그렇게 편제되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토지의 사적소유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고려 조선시대 경제사는 사실 그러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제대로 규명해야만 온전히 드러나는데 우리나라는 경제사 관련 사료 자체가 원체 적은 데다 식화지에 써 놓은 토지제도는 그야말로 북한 정권의 배급제 같은 것이라 공적인 차원에서 써 놓았을 뿐 그 제도는 시행했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했고 제대로 시행이나 되었었는지도 의문이다.
3. 고려시대 전시과 체제와 조선시대 과전법 체제는 거의 비슷한 제도다. 양자간 차이는 군인전 정도다. 군인전이란 그야말로 중하급 군인들이 군역에 봉사하는 댓가로 받는 땅이라는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군역은 무료봉사였다. 월급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고려시대까지도 이러한 군인들의 군역에 대해 군인전이 지급되면서 조선시대보다는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병력 수십만이 창출될수 있었다고 본다. 광종대 광군光軍 30만이 나오는 배경은 바로 군인전 때문이다.
4. 그나마 군역 댓가로 지급하던 군인전을 없애고 관료와 공신 땅에 대한 제도만 남긴 것이 과전법 체제다. 명백히 율령체제하의 반전수수班田收受를 닮았지만,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토지 소유는 국유가 아니라 사전私田이 대부분이었다고 본다. 그 흔적이 가끔 사서에 "주와 군을 넘어 만들어진 농장"이라던가 "겸병이 심하여 송곳 하나 꽂을 수 없는" 상태로 언뜻 언뜻 나타나는 것이다.
전시과체제 바깥에 거대한 사전이 있었기에 고려사에 "장"이 나오고 "처"가 나오는 것이다. 전시과체제가 전국적으로 물샐틈 없이 관철되었다면 이러한 사전 확대 문제는 나올 수가 없다. 알다시피 고려시대 내내 사전 확대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적이 없다.
5. 전시과-과전법 체제를 그러면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의 공무원과 공신에게 줄 봉급과 포상을 위한 토지를 따로 떼두어 국가 행정기구가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재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전시과와 과전법 체제 바깥에는 이 체제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대한 "사전의 바다"가 있었다고 보는데, 이 사전의 바다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시과와 과전법 체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마치 율령체제하의 반전수수班田收受처럼 작동했다고 봐서는 곤란할 것이다.
6. 정보가 없다고 해서 전체를 반영하지 못하는 파편적 정보를 당시의 전체를 설명하는 자료로 쓸 수는 없다. 자료가 없어서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것이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바로 공자님 뜻 아니겠는가?
공자님이 말씀하셨 듯이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는 말씀을 잘 새길 수 있어야 비로소 참다운 知의 세계에 들어가갈 수 있다.
*** 편집자注 ***
본문에서 필자가 말하는 반전수수班田收受란 국가가 특정한 토지 분급 대상자들한테 무슨 명목으로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반급班給해 주고(이를 반전班田이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세를 거두어 들이는(이를 수수收受라 한다) 제도를 말한다. 그 대상 토지는 국가가 주니 당연히 공전公田이다. 공공토지라는 뜻이지만 그때 무슨 공공 개념이 있겠는가? 간단히 국가 소유 토지다.
중요한 지점은 소유권도 넘기는가다. 왜 넘겨? 소유권은 그대로 국가가 보유하고,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도로 거두어 들여 그걸 다시 다른 사람한테 분급한다. 공공토지 불하이기는 하되, 이용권 혹은 수취권만 준 데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연속해서 줄곧 전시과니 과전법이니 하는 한국사 제도를 비판하는데, 그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침소봉대하는 역사학을 비판한다. 필자에 의하면 저런 제도가 마치 전국에 걸쳐 시행된 것처럼 설명하지만 개소리라, 국유지에 대해, 것도 관료들 봉급 대신 지급하는 제도였다는 것이다.
저런 제도가 전국에 걸쳐 시행되기 위한 조건은 전 국토가 왕토王土 혹은 국유國有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또한 개소리라, 전 국토를 국유화하면 누가 그 혁명을 찬성하겠는가?
물론 이런 제도가 일시로 성과를 낼 수는 있다. 실제 북한의 토지개혁이라는 게 이딴 식이다. 하지만 그 제도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인간의 소유 본능을 언제까지 억누를 수는 없다.
그건 그렇고 저런 국유라 하지만 그게 진짜 국유인가? 이 또한 개소리라, 권력 쥔 놈들의 사유화에 지나지 않는다. 프롤로타리아 이름 팔아, 공공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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