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지만 의외로 아는 부분이 많지 않다.
대원군은 당시 당쟁의 온상이자 민폐의 진원지인 서원을 없앤다 하여 각광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서월철폐후 조선땅에는 40여 개 잔존 서원을 제외하면 서당 외에는 교육기관이 일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원철폐 후 이를 대체하는 교육기관을 국가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정황을 보면 아마 사실일 것이다.
대원군-고종 연간 상황을 보면 이 시기가 일본 메이시시대에 거의 대응하는데
필자가 이 시기에 조선왕실이 조금만 제정신이고 똑똑했다면 나라가 식민지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이야 하는 부분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근대적 교육기관은 개화를 하게 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것 같지만,
근대화를 위해 단 한푼이 아까운 상황에서는 이러한 전근대적 교육기관이 축적한 인재, 재원, 건물 등은 근대적 교육기관을 급조하는데 소중한 재원이 된다는 말이다.
뒤에 기회를 보아 자세하 소개하겠지만, 일본 가가번加賀藩 번교藩校 "명륜당明倫堂"이 메이지유신 국면에서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를 보자.
加賀金沢藩の明倫堂
11代藩主・前田治脩によって寛政4年(1792年)設立。初代学頭は新井白蛾。当初は兼六園の南西部に建てられたが、居館の建立のため文政5年(1822年)に仙石町(現在の四高記念文化交流館と石川県中央公園の一部)に移転した。南西から北東方向へ廊下が続いていた経武館が武を重んじたのに対し、明倫堂は儒学等の学問を教える学校となっていた。教員は読師、助教、教授という身分に分かれ、生徒は下級武士や陪臣などが多く、生徒数は200名乃至300名でほぼ一定していた。なお設立の目的の一つに身分を区別しない四民教導があったが、それ以外への開講は限定的だった。授業内容が和学、天文学、本草学など多岐にわたる事が特徴であったが、儒学にそった漢字が多くを占めていた。
洋学の導入にともない1870年(明治3年)10月に閉校し、翌月に皇学と漢学を教える中学西校が明倫堂と経武館の校舎で開校した。翌年には洋学中心だった中学東校と合併して金沢中学校となったが、翌年四月にこれも閉校している。後に旧制第四高等学校の一部となった。なお、石川県立野々市明倫高等学校の校名は、この『明倫堂』にちなんでつけられた。
가가번 번교는 1792년에 개교하여 번사 200-300명 정도를 가르치던 교육기관이었는데, 메이지유신 후 이 학교가 어떻게 구제고등학교로 흡수되는가를 보여준다.
가진 것도 돈도 없는 후진국 근대화 시기에는 모든 것이 아쉬운 법이다.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 초반에는 기존의 데라코야와 번교, 막부학문소 (우리의 성균관에 해당) 등 가용한 모든 것을 쥐어짜서 근대적 교육제도를 "급조"하였다.
이때문에 일본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학교에 바로 이러한 메이지이전의 교육기관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을 보존하고 뭐고 하는 그런 한가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뭐라도 만들어 놔야 한다는 절박감의 소산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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