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김해 대성동고분의 이른바 꽂이용 빗(1) 櫛? 簪?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22.
반응형

김해 대성동박물관이 91호분과 함께 2014년 조사한 대성동고분군 88호분은 금관가야 최고 유력자급 인물이 묻힌 곳으로 판단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순장이 확인된 까닭이다.

이를 조사한 박물관에서는 무덤을 만든 시기를 91호분은 4세기 2/4분기, 88호분은 4세기 3/4분기로 설정했거니와 이렇게 슬라이스 짜르듯 연대가 확실한가는 치지도외한다.

다만 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대략 서기 350~400년 무렵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정도로 해둔다.

이 무렵이면 신라로서는 내물왕 시대에 해당하며 일본 열도는 고분시대라 해서 볼품없는 자들의 대표 증상, 곧 껍데기 크게 만들기에 돌입한 초창기에 해당한다.

이 무렵 금관가야 지배자급 무덤 양상을 보면 왜색이 대단히 짙은데 저들 무덤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것이 꼭 왜에서 비롯하는 유행인지 혹은 외려 그 방향이 까꾸로일 수도 있을 법한데 하긴 뭐 저짝도 한반도 영향이 매우 짙은 시기라 주고받기 했다 보는 편이 정확하겠다.

암튼 저때 판 무덤 중 88호분에서는 이상한 양상 하나가 드러났는데 인골 분석 결과 십대 소녀랑 이십대 남자로 각각 간주하는 두 피순장자 머리맡에서 각기 이른바 빗이 한 점씩 발견된 것이다.

이 사정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 그 공식발굴보고서 다운로드에 문제가 있어 저 두 빗을 보존처리한 사람들 보고에 빌려 정리 소개하고저 한다.



앞이 발굴 당시 순장자와 빗 발견 지점이라

이로써 보면 빗은 두 사람이 각각 머리에 꽂은 상태였음을 본다.

이 빗은 이걸 난중에 보존처리한 국립김해박물관 친구들이 복원한 양상을 보면 아래와 같아



우리가 조심할 점은 저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했겠지 하겠지만 글타고 그걸 백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일단 존중은 하되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말아야 하며 아 저 정도 모습이었겠구나 하고 받아들임 그만이다.



처리 당시 세부 모습은 저랬다 한다.

저 모습은 영영 사라졌다.

살피니 뼈다구다. 이른바 골제骨製다.

애니웨이 저걸 저리 복원하고나니 저걸 어떤 식으로 착장했을까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거니와




이런 모습을 제시한다.

이렇게 보면 저건 빗이 아님을 단박에 안다. 저건 비녀 같은 꽂이 일종인 잠簪으로 봐야 한다.

꽂이 장식이며 뭐 저 담양 땅 문명 세례 제대로 받지 못한 영디기는

와리바시 꽂이 원형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던데 꽤 폐부를 찌른 말이라 본다.

꽂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장식이 길쭉해야 하며 또 머리는 틀어올려야 한다.

그 둘둘 말아 올린 머리카락 더미로 푹 쑤셔박아 장식으로 쓴 까닭이다.

저런 식으로 명확하게 머리꽂이 이른바 빗 장식이 나오기는 한반도에서는 처음이 아닌가 하거니와

문제는 이게 일본 열도로 건너가면 사정이 딴판이라 흔해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를 일본고고학도들은 길쭉이 빗이라 해서 수즐竪櫛이라 한다.

근자 일본고고학을 흔든 나라 부웅환산고분 딸린 무덤 통나무 목관에서는 물경 아홉점인가에 달하는 수즐이 나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