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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대원군은 마무리한 한 서원철폐] (4) "문중은 망했다" 서자들 집단 시위에 결국 굴복한 노상추 집안

by 신동훈 識 2026.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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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차별을 철폐하라는 서자들의 집단시위는 맹렬했다.

 

우리나라 족보는 조선시대 후기 뒤쪽으로 갈수록

처음에는 이름도 안 올리던 서자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그 이름 앞에 붙어 있던 '서庶'라는 글자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집안 족보가 17세기부터 18, 19, 20세기에 대략 출간되었다고 본다면, 

각 족보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재미 있는 구석이 많다. 

17세기 족보에는 서자는 전혀 없지만, 

18세기부터 서자가 등장, 이름 꼭지에는 서자를 붙이되, 

19세기가 되면 서자라는 표식이 날라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범상하게 봐서는 안 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리고 김단장께서도 이야기한 것 같지만, 

주류 양반사회는 이들 서자에 대해 절대로 호의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왠만하면 얘들은 평민으로 내려가 줫으면 좋겠는데, 

양반 끝머리에 달랑달랑 붙어서 계속 양반이라고 코스프레 하니 

주기적으로 털어내는 작업이 바로 향교의 교생 고과 같은 작업으로, 

균역법?

균역법도 그 이전에는 군포 두 필을 내지 않던 누군가가 1필을 새로 부과해야 하는 바, 

이를 바로 이들 서자 집단에서 산출해 내고 이들에게 그럴 듯한 이름 하나를 붙여 준 것이 바로 "수포군관收布軍官"이 되겠다. 

(사실 서자들은 자기들이 군관을 받을 정도로 낮은 신분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가 많았다. 출신군관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따라서 수포군관이 되건 뭐가 됐건 서자들은 여기에서 탈출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족보에서 서자들이 자신들 이름을 올리고, 

또 자기 이름에서 서자라는 명칭을 떼 버린 것은 서자들 스스로가 싸워서 쟁취한 것이지

양반들이 선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상추 일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시 이 집안 서자들은 적자들에게 족보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되 서자라는 꼭지 다 떼버리라고 추궁한 바, 

노상추 집안 적자들은 서자들의 요청을 거부하는데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 

왜냐, 

당시는 영조 집정기였는데, 

영조가 이런 서자들 움직임을 방조한 듯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노상추 일기를 보자. 

 

"洙가 (가문의 서자) 토지를 사고 종을 사서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수가 종가의 노비를 모두 사버렸지만 환례만은 사지 못했다."

"오늘 모임에서 노수가 갑자기 족보에서 "庶"자를 없애자는 말을 하였다. 종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업신여기는 것이니 할 말이 없다"

"지금 종족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洙에게 유혹되어 기필코 일을 그르칠 것이다. 나중에 족보를 그르칠까 심히 걱정된다"

"庶자를 빼는 일은 이미 결정났으므로 빨리 인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일은 한두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닌데도 끝내 일이 이렇게 결정되어 버렸다. 아아 무리 문중은 이제 망할 것이다. 일개 서자가 발언하는데도 바로잡는 논의는 하지 않고 화답하니, 아 비통하다"

"庶派의 경우에 그들의 이름앞에 쓰여진 "서"라는 글자를 모두 제거하고 적자와 똑같이 기재하고 하천한 무리들도 모두 모씨라고 칭하기로 했다고 한다. 

"족보의 초본을 보니 庶자가 모두 삭제되었고 일가친척이 모두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1771년 영조 47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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