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속활자는 다들 아시겠지만 소량 다품종 도구다.
대량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한번 판을 짜면 한 백부나 찍었을까.
20-30부 찍고 판을 깨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던 듯 하다.
요즘으로 치면 복사기보다 조금 더 찍는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가 그 정도였기 떄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인쇄가 필요한 경우는 알다시피 목판을 찍었을 테고.
항상 드는 의문은
대장경판목-.
초조대장경부터 재조대장경까지 판목수가 정말 수십만 장인데
이거 판각한 후 과연 몇 질이나 인쇄했을까.
지금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
조판 후 지금까지 몇 부나 찍었을까.
왜 이런 생각이 드는고 하면
팔만대장경 전체를 과연 몇 번이나 인쇄했을까 싶어서다.
그만한 종이와 먹이 과연 넉넉했을까.
대장경 조판이 이루어지던 시대
일본은 대부분의 서잭은 목판도 아니고 필사였다.
지금 일본이 자랑하는 에마키.
그것도 지금이니 서양 수도사들의 필사본처럼 채색의 아름다움이 찬상받는 것이지
한 권 한 권 직접 손으로 그리고 있으니 이는 뒤집어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에마키모노를 즐길 수요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대장경으로 돌아와-.
대장경은 과연 경제적으로 타당한 프로젝트였을까.
대장경은 불경의 대량 인쇄를 위한 것이었을까?
대장경 조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을까.
이것으로 책을 찍어 많이 보급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을까.
*** Editor's Note ***
필자가 제기한 몇 부 찍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이혜은 교수 논문이 있다.
기회 되면 그 논문을 요약 소개해 볼까 한다.
오십부 백부가 보통이었고 보급판은 좀 더 찍었다.
왜?
돈 들어가잖아? 무료 보급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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