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16 17:20:06
작성부서 문화부 DESK부서 문화부
내용 유형문화재
<달항아리의 기적, 박살 후 복원>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광복절인 15일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를 기념한 특별전으로 '달항아리' 전시회를 마련했다.
다음달 25일까지 계속될 이 특별전에는 아홉 점에 이르는 달항아리 실물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국보 제262호인 우학문화재단 소장품과 보물 제1424호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외에 보물 지정이 예고된 다른 항아리가 포함됐다.
물을 건너온 달항아리는 두 점. 하나는 영국박물관 소장품이며 다른 한 점은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다. 원래 제작처야 조선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달항아리란 말 그대로 달덩이같은 항아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미술사학계에서 쓰는 다소 근엄함을 풍기는 학술용어는 백자대호(白磁大壺). 좀 더 정확한 명칭은 대호백자(大壺白磁)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달항아리란 말에 비해 사실 백자대호라는 말이 이 도자기 개념을 더욱 잘 설명하는 측면이 있다. 달항아리에는 크기 개념이 없다. 도자기 중에서도 백자라는 개념도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백자대호를 그대로 해석하면 백자이면서 큰 항아리라는 의미가 된다.
'大'라고 한다면 도대체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에 대해 현재까지 존재가 보고된 달항아리는 대체로 높이 40㎝가 넘는다. 다른 도자 제품들과 비교해서 대형급임은 분명하다.
이 달항아리를 언뜻, 그리고 처음에 보면 대체로 반응은 다음과 같다.
"저렇게도 멋이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달항아리는 묘한 맛이 있다. 청자처럼 화려찬란하지도 않으면서도 문양이라고는 찾으려 해도 찾을 길이 없는 이 요강단지같은 백자는 볼수록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개관 기념으로, 그것도 출품작이라고 해야 아홉 점에 지나지 않고, 나아가 언뜻 보아 그게 그것인 이 달항아리를 한 곳에 모은다고 했을 때, 여러 사람이 우려를 표명한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박 같은 아홉 점을 '걸어 놓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정리되어 깨끗한 수장공간에 자리를 잡은 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을 들어서면 밤 하늘에 보름달 아홉 개가 떠 있는 듯한 상념에 젖어든다.
한데 이들 전시품 중에 정말 '요물'(妖物)이 있다. 다른 여덟 점과는 달리 유난히 흉터 자국이 많은 듯한 작품이 있다. 그 흉터 자국은 언뜻 보면 못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 결정적인 손상을 본 듯한 낌새도 없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인 이 달항아리만큼은 여타와는 달리 전시공간 한 켠에 사진 두 장이 특별히 배치돼 있다. 그 사진 두 장에는 수백 점에 이르는 깨진 사기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진은 무엇이고 또 이 달항아리는 무엇일까?
가루에 가까울 만큼 수백 조각으로 박살난 것을 땜질해 놓은 것이 다름 아닌 지금의 실물이다. 무슨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이번 개관에 맞춰 방한한 이토 이쿠타로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장이 말하는 이 달항아리 역사와 그 박살 사건은 이렇다.
'소설의 신'이라 일컫던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라는 문학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혼란기에 도쿄를 떠나 잠시 나라(奈良)시 소재 화엄종 계열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 산하 작은 사찰 관음원(觀音院)이란 곳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당시 이곳 주지는 가미쓰카사 가이운(上司海雲). 체재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돌보아 준 감사의 표시로 시가는 가미쓰카사 스님에게 조선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을 보냈다. 이후 이 달항아리는 '시가의 항아리'라 일컫게 되었고, 덩달아 가미쓰카사 스님 또한 항아리법사(壺法師)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95년 7월 4일 대낮에 이 항아리가 보관된 관음원에 남자 도둑이 들었다. 당시 주지는 신토 신카이(新藤晉海) 스님. 도둑을 발견한 스님이 큰 소리를 지르며 경비원을 부르자, 이에 놀란 도둑은 노리던 달항아리를 갖고 튈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냅다 그것을 머리 위로 쳐들어 올렸다가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도둑은 도망가고 달항아리는 무참하게 박살났다.
주지 스님은 고고학자에게 도움을 청해 사기 조각들을 솔로 쓸어 분말까지도 봉투에 담았으며 큰 조작은 신문지에 쌌다. 이런 조각만 해도 300점 이상이었다.
경찰조사가 끝난 뒤 일찌감치 이 항아리를 알고 있던 오카사시립미술관은 끈질긴 설득 끝에 조각과 분말이 되어버린 이 백자 달항아리 파편들을 모두 넘겨 받았다.
2년에 걸친 검토 결과 미술관은 가능한 곳까지 수리, 복원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 분야 전문가와 접촉했다. 하지만 파편과 분말의 참상을 본 수리복원 전문가는 말문을 잃었다. 그래서 계속 설득하니 마지 못해 남긴 말이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6개월이 흐른 어느날 이 복원 전문가가 미술관 이토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서 복원실로 달려가니 그가 이상한 백자 달항아리는 내어 놓았다. 박살이 난 그 달항아리였다. 놀란 이토 관장에게 복원전문가는 선택을 강요했다.
"이것이 중간 단계입니다. 향후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모로 보나 수리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세히 관찰하면 복원 흔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하실까요?"
이토 관장은 두 번째를 선택했다. 이렇게 복원된 백자 달항아리는 복원을 기념한 특별전에 출품되었고, 2000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도 전시됨으로써 필립 드 몽트벨르 관장을 비롯한 전문가들에게서 격찬을 받았다.
분말과 300개 조각으로 박살이 난 참상과 그것의 복원된 현대적 모습이 어떤지 궁금하거든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가라.
taeshik@yna.co.kr
(끝)
***
때는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절이었고, 저 무렵 저 전시회를 주도한 당시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소재구였다. 두 사람은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소재구는 국립박물관에서 넘어 와서 문화재청에서 퇴직했다.
저 전시는 고궁박물관 개관을 기념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소재구로서는 국립박물관을 향한 시위이기도 했으며, 나아가 국립박물관장이 되고 싶었던 유홍준의 회심작이기도 했다.
저 전시를 계기로 달항아리를 향한 붐이 다시 일었으며, 그 덕분에 달항아리는 당시 점당 20억원을 호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저 전시회 무렵 유홍준은 달항아리 보물 지정을 몰아부쳤으니, 그리하여 당시에 알려진 달항아리는 웬간한 것은 모조리 보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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