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도시대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도자마外様[외양]
신판親藩[친번]
후다이譜代[보대] 다이묘다.
이 중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집안 인척들이며
후다이 다이묘는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이전에 이미 도쿠가와 집안에 종사하던 집안 후예들이며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라라 이후에 도쿠가와 지배하에 들어온 집안들이었다.
도자마 다이묘라고 하지만 그 사정도 천차만별이라.
사쓰마와 조슈는 세키가하라 전쟁 때 도쿠가와 집안에 적극 협력하지 않아 완전히 눈밖에 난 집안으로
서쪽 끝에 말그대로 쳐박아 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에도시대 내내 도쿠가와의 중심지라 할 관동과 관서 일대에는 막부령과 신판, 후다이 다이묘가 배치되며
그 바깥쪽에 도자마 다이묘가 둘러싼 모양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도자마 다이묘가 집중 배치된 지역이 결국 막부를 쓰러뜨리는 기초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후삼국 지도를 보자.
후삼국 시대 이 지도를 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
결국 통일신라 시대 오소경이 있던 지역은 전부 함몰되고
신라땅으로 남은 지역은 오소경 안쪽 땅만 달랑 남았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오소경 지역은 에도막부의 도자마 다이묘와 같은 땅이었던 셈이 되겠다.
신라의 금성 주변은 오소경 지역과는 달리 처음부터 신라가 보다 믿을 수 있는,
신판이나 후다이 다이묘와 같은 세력이 집중 배치되지 않았을까.
믿을 수 있는 자는 가까이,
그렇지 않은 자는 멀리 두는 것은
통일신라나 에도시대 일본이나
비슷했던 셈이다.
*** editor's note ***
혁명은 언제나 중심부에서 밀려난 사람들 특권이다.
밀려나지 않은 사람들이 혁명을 할 이유는 없다.
저 변방은 그런 까닭에 틈만 나면 독립하려 하거나 중심이 되려 하며 그 힘이 혁명으로 발현하여 전복을 꿈꾸니
이 성공한 전복 시도를 혁명이라 이름한다.
후삼국 전개가 그러했고 에도 말기 메이지유신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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