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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이순신(1545-1598)을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지은 이는 일본 근대의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도쿠토미 소호(1863-1957)다. 그가 지은 <근세 일본 국민사>의 임진왜란 부분에 저 글이 나온다던가(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동생도 당대 문필가로 유명했던 도쿠토미 로카(1868-1927)인데, 그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묵을 갖고 있던 것으로 우리에겐 유명한 인물이다.
젊어서는 민권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군국주의에 기울어지고 끝내는 A급 전범으로까지 기소된 인물 도쿠토미 소호.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런 그도 한국과 인연이 없지 않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가 그를 초빙해 <경성일보>라는 일본어 신문의 감독 자리에 앉혔다. 요즘으로 치면 사장이라 해야 할까 편집장이라 해야 할까.
몇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경성에 살았고, 그러면서 서점도 다니고 여러 사람과 교류도 한 모양이다. 그런 그의 흔적이 책 한 권에 담겼다.
<성궤당한기成簣堂閑記>라는 책인데, 아마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산이 되지 못했다는 옛 중국 고사에서 당호를 따왔던가 싶다. 글 쓰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도쿠토미 소호도 책 모으는 걸 즐겼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엮어냈다.
청말~민국시기 전각의 명인 오창석(1844-1927)을 비롯한 이들이 새겨준 장서인을 머리에 싣고 쇼와 8년에 1,000부 한정판으로 냈다니 1933년, 그의 나이 71세 때의 일이다.
나 또한 소호만큼은 아니어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우연히 소호의 친필이 담긴 증정본을 손에 넣었다. 아마 그 당시 일본 바둑의 국수國手로 '미나미'라는 성을 지닌 이가 있었던지, 그에게 드린다는 글이 면지에 적혀있다. 케이스에 기름종이까지 온전한 상태다.
그런데 책 표지부터 사람의 시선을 확 끈다. 한자, 가나, 알파벳이 찍힌 종이가 겹쳐진 하드커버. 심지어 그 종이들은 실제 책에서 뜯어낸 것처럼 생생하다. 맨 뒤의 편집후기를 보니 진짜 책에서 뜯어낸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이 아닌가.
조선판 <시경언해>, <통감절요>, <대전통편>, 일본판으로는 18세기에 인쇄된 무슨 책, 거기에 1500년대 포르투갈 역사를 기록한 양서洋書까지.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충분히 가능했던가 보다.
하기야 그 정도로 정성을 들인 호화판이었으니 3원 50전이나 했겠지 싶다. 이때 일본은행권은 조선은행권과 1:1 환율. 그러니 3원 50전이란 김첨지가 운수 좋은 날 종일 인력거를 끌어도 하루에 못 버는 액수다.
조선에서 경험한 헌책방, 경성에서 구한 <도연명시집>과 <유종원시집>, 거기에 김윤식(1835-1922), 이완용(1858-1926) 같은 이들과 교유한 내용까지 한국 관련 기사만도 꽤나 재미있었다.
거기에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가 직접 베낀 <황명시선>을 구했다든지 하는 얘기들도 퍽 흥미롭다. 역시 책 좋아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싶다. 그렇다고 그의 행적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에피소드 하나. 도쿠토미 소호가 조선 말 온건개화파의 거두 김윤식을 만나러 종로 봉익동에 찾아간 것은 1921년이었다. 이때 운양노인雲養老人은 87세의 극노인이었다.
그때 59세의 소호는 일본에서 만든 카스테라를 선물로 들고 갔다. 그게 늙은 망국의 관료로 하여금 붓을 들어 감사의 글을 남기게 했다. 나가사키 카스테라였으려나.
아, 먹어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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