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독도야말로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로서 실효적 지배가 분명히 합법적이라는 쪽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독도 영유의 역사적 연원과 일본의 독도 침탈 문제에만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미 규명된 사실 중에 우리가 놓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이승만정부 때 이른바 평환선, 이승만 라인의 성립의 전후 사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만 써 보겠다.
독도가 대한민국 정부의 실효적 지배 하에 놓인 결정적 사건이 이승만의 평화선=이승만 라인의 선포인데,
이 평화선이 선포될 당시는 한국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이었다.
이 평화선이 선포되고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작한 시점에, 일본정부가 왜 항의를 하지 못했는가 하면,
김 단장께서도 쓴 글처럼 평화선 선언 당시, 일본 정부라는 게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반, 동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가 중 (마오, 김일성 등 포함하여) 가장 탁월한 정치적 감과 역량을 보여준 이승만은 독도를 한국의 실효지배에 두는 시점과 과정도 절묘했다.
평화선이 선보된 시점이 일본 정부의 수립 불과 몇달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정부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이야 그랬다 치고,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GHQ는 도대체 왜 이승만의 평화선을 보고만 있었을까?
당시 미국은 한국애서는 전쟁을 한국 정부 대신 주도적으로 치르고 있었고 일본은 GHQ로 통치하고 있어 한일간 분쟁의 소지가 될만한 사건임이 분명한 이승만 라인의 선포에 대해 뭔가 제동을 걸 움직임이 있었어야 할 것 같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왜 이승만의 평화선을 묵묵히 쳐다만 보고 있었을까?
여기에는 1946년 당시, GHQ가 아주 흥미로운 군정명령을 발효한 사건이 얽혀 있다.
1946년 2월,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의 GHG는 "Governmental and Administrative Separation of Certain Outlying Areas from Japan"라는 이름으로 군정명령을 선포하는데 그 3항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3. For the purpose of this directive, Japan is defined to include the four main islands of Japan (Hokkaido, Honshu, Kyushu and Shikoku) and the approximately 1,000 smaller adjacent islands, including the Tsushima Islands and the Ryukyu (Nansei) Islands north of 30° North Latitude (excluding Kuchinoshima Island); and excluding (a) Utsuryo (Ullung) Island, Liancourt Rocks (Take Island) and Quelpart (Saishu or Cheju) Island,
(b) the Ryukyu (Nansei) Islands south of 30° North Latitude (including Kuchinoshima Island), the Izu, Nanpo, Bonin (Ogasawara) and Volcano (Kazan or Iwo) Island Groups, and all the other outlying Pacific Islands [including the Daito (Ohigashi or Oagari) Island Group, and Parece Vela (Okino-tori), Marcus (Minami-tori) and Ganges (Nakano-tori) Islands], and (c) the Kurile (Chishima) Islands, the Habomai (Hapomaze) Island Group (including Suisho, Yuri, Akiyuri, Shibotsu and Taraku Islands) and Shikotan Island.
라 하여, 일본의 영토에서 "독도 (리앙쿠르 암초}"를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분리한다, 라고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이 군정명령은 포츠담선언 당시 모호한 일본의 전후 영토를 규정한 측면이 있는데, 여기에 '독도'를 특별히 규정하여 놓은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할 수 있다.
이 군정명령이 사실 독도 문제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데, 미국이 이승만의 평화선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평화선은 미군정의 손에서 요리될 가능성이 높던 독도문제를 한반도 국가가 영유하게 된것으로 1946년의 미군정 명령이 없었다면
역사적으로 독도가 한국땅이었냐 아니었냐와는 별개로 평화선 선포 당시부터 미국의 경제를 받아 굉장히 복잡해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1946년 당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한다고 GHQ 스스로가 명령을 해버렸기 때문에 일본영토에서 분리된 독도는 일차적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영토라는 것이 부인되며
이후 다른 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느냐, 아니면 오키나와처럼 GHQ가 계속 통치하다가 일본이 재 점령하는가의 양자택일의 선택만 남게 되었다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1946년 일단 당시 미군정이 독도를 일본에서 분리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6년 미군정 명령은 이 명령 당시까지도 독도의 이후 운명은 다양하게 열려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 결국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는 여러가지 가능성이 열려있던 미군정 명령 이후의 독도를 한국에 귀속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독도의 한국 실효지배에 있어 미군정 명령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에 거의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을 수 밖에 없던 신생 독립국의 대톧령으로서 이승만이 독도문제에 있어 미국(미군정, GHQ)의 헛점을 이렇게 노리고 치고 들어간 것을 보면,
그는 동아시아에서 당시 가장 유능한 정치가로서 다른 정치인들 (일본의 전후 정치인들 포함)과는 수준을 달리하던 사람임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1946년의 미군정 명령과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의 일본 정부 공배기라는 순간을 치고 들어간 이승만의 외교적 결단도 절묘하고도 대담한, 정치 9단의 한 수라고 이야기 할수 밖에 없겠지만,
도대체 어떤 경로와 판단을 거쳐서 1946년 당시, 미군정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분리시켜 버렸는가도 그 당시의 전후 사정을 역사가들이 한 번 꼼꼼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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