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줄기차게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
그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동진시대 도사 갈홍 저술 포박자抱朴子에 보이는 기술이었으니
그에서 갈홍은 선경仙經이라는 지금은 망실한 도교 옛 문헌을 인용하며 이르기를
"옛날엔 동경은 등에 울러맸다"
고 했거니와,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야 한다.
첫째, 동경은 본래 도교에서 법구法具로서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본래는 등에 울러매서 사용했다는 것이 그것이며
둘째 그것이 옛날에는 그러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갈홍 당시에는 그 착장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본래하는 착장 방식은 근간이 등에다가 둘러매는 것이었지 결코 가슴팍에 걸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대가 흘러 동경을 착장하는 방식이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어니와
그리하여 가슴팍에 걸치기도 했겠으며, 또 따로 아예 두는 방식을 썼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은 원칙이다.
동경은 등에 울러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령왕릉에서 단적으로 확인하며
나아가 무엇보다 경산 양지리 목관묘에서 더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 심각성을 조사단인 성림문화재연구원도 몰랐고, 해당 관련 유물 일체를 이관받아 전시 중인 경산시립박물관도 그 심각성을 여직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양지리 보고서 봐라. 분명히 시신 등 아래서 동경이 출토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경산시립박물관 관련 영상도 그리 설정했다.
다만 보고서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고, 이 심각성, 곧 동경은 본래 등때기에 둘러맸다는 이 사실을 전연 모른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이 점은 대서특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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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은 등때기에 울러맸지 가슴팍에 걸치지 않았다
동경은 등때기다 울러맸지 가슴팍에 걸치진 않았다!!!
동경을 등때기에 울러매고 다닌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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