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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동아시아 근대와 상무정신尙武精神의 발견 : 韓·中·日, 특히 韓國을 중심으로

by taeshik.kim 202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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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와 尙武精神의 발견 : 韓·中·日, 특히 韓國을 중심으로(The Invention of ‘Militaristic Spirit’ in Modern East Asia)>

2011년, 한국고대사탐구학회 기관지 《한국고대사탐구》 9호(p.p. 273-329)에 투고한 200자 원고지 300매짜리 내 논문이다.

이 논문은 나로서는 자료수집에 1년, 집필에 대략 5일을 투자한 나름의 노작勞作이었다.

지금은 다른 데로 옮긴 경주인터체인지의 화랑동상. 박정희시대 기념물이다. 리선근이 글을 썼다.



나는 내가 쓰겠다고 작심한 어떤 주제가 주어지면, 그에 대한 관련 선행 논문은 전연 보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듯이 내가 내 얘기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미쳤다고 남들 한 소리를 쳐다본단 말인가?

그 선행 연구성과라는 괴물은 내가 내 글 다 쓰고 나서 비로소 쳐다본다.

이 논문 완성을 위해 나는 우선 애국심 성전이라 할 만한 파악에 들어갔으니, 그 출발도 종착점도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었다.

불어를 모르므로 우선 그 이해는 국역본을 기초로 하되, 중대한 곳듵은 영역본을 밑거름 삼았다. 덕분에 이 놈의 계약론은 물리도록 일기 반복을 거듭했고 덧붙여 그의 폴란드론도 영역본으로 봤다.

계초 아저씨. 동아시아 월드스타였다.



이를 얼개삼되, 양계초를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로 설정했으니, 양계초야말로 동아시아 근대 애국심과 그 일환으로서의 武士의 재발견 핵심이라 판단한 까닭이다.

내가 그의 《음빙실집》을 구득한 때가 이 무렵이다. 그의 선생 강유위도 찾았으나 《대동서》는 결이 좀 달라 이내 물리치고 말았다.

내가 루쉰을 검토한 때가 이 무렵이라, 당시까지 마침 그의 전집이 발간되기 시작했으니, 내게 필요한 그의 잡문들은 다행히 그때까지 거의 다 번역이 이뤄졌으니, 이것이 나로서는 축복이었다.

스파르타주의자 루쉰



루쉰은 그 이전 그의 이른바 단편집들을 읽어면서 받은 막연하게 형성한 이미지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상무주의자로써 그를 검토한 결과는 내 예상은 한치 어긋남이 없었다.

루쉰은 그 시대에 필요한 존재였지, 그것의 현재적 재림은 재앙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그는 스파르타주의의 열렬한 찬양자다.

본래 의사를 꿈꾼 그는 현대 중국을 환자 취급하면서, 그 병인을 진단하거니와, 그 일환으로 양계초가 그랬던 것처럼 文弱을 발견한다. 중증 노인 중국이 이리 된 까닭은 문약한 까닭이라 진단한 그는 그것을 일소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尙武정신의 부활을 부르짖는다.

이를 설파한 논설들을 접하면서, 내가 그간 막연히 품은 루쉰은 한층 명료하게 다가왔으니, 아큐정전이며, 광인일기 같은 그의 소설이 비로소 그 궁극의 목표점을 잡게 되었다.


내가 작성한 저 논문 초록은 다음과 같다.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들은 국망國亡 혹은 국난國難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문약文弱’을 발견했다. 간단히 말해 文에만 치우쳐 武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국가적 위기가 초래했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文弱의 발견은 필연적으로 그 극복 방안으로서 尙武정신을 재발견했다. 이는 동아시아 3國에서 공통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이순신과 을지문덕으로 대표되는 救國의 영웅들이 재발견되고, 신라의 ‘화랑정신’이 재발견됐다. 조선에서의 이런 흐름의 직접 단초를 연 이는 중국인 양계초였다.

채호 신

1898년 무술정변戊戌政變 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열렬한 언론활동을 통해 ‘국민 만들기’에 주력한다. 그 일환으로 새로운 國民像으로 ‘신민新民’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도덕윤리 중 하나로 충만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의 무장을 들었다. 양계초는 중국이 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문약文弱의 병폐를 들었다.

사회진화론에 충실한 그는 “중국이 진정으로 문명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文弱한 풍조를 청산하고 상무정신을 드높여야 할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와 같은 진단은 결국 새로운 국가, 새로운 국민, 즉, 新民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文弱을 몰아낸 자리엔 충만한 尙武精神이 차지해야 한다. 이런 尙武精神을 체득한 國民이 주인인 國家는 종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한 君主를 대신한다. 王에서 國家로 권력 중심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국심(조국애)이야말로 양계초가 새로운 중국에 대해 제시한 ‘시민종교’였다. 이런 양계초의 생각이 조선에도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양계초의 그것은 일본 망명생활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尙武精神을 강조하는 양계초에게 《중국지무사도中國之武士道》라는 저서가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시사적이다.

1904年 간행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양계초 본인은 서방과 일본 같은 外國人이 중국을 깔보면서 “중국의 역사는 武의 역사가 아니며 중국의 민족은 武의 민족이 아니다”는 말에 격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중국사에서 상무정신의 전형을 보여주는 존재로 무사도라는 존재를 배양하게 한 직접 동인은 日本 武士道였다. 이 일본 무사도는 니토베조에 이르러 비로소 ‘대화혼大和魂’으로 재발견됐다.

1899년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된 니토베 이나조의 《Bushido》

189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영어판으로 먼저 나온 니토베의 《Bushido》는 그 부제가 ‘the Soul of Japan’이라는 점에서 보듯이 그동안 일본을 열등한 동양의 한 국가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일본 근대국가 이데올로그가 던진 반항이었다. 니토베는 ‘Bushido’를 중세 서양의 ‘기사도’에 비견하며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중세에 있었음을 찬양했지만, 이것이 근대 일본의 創案이자 ‘발견’임은 그와 동시대를 일본에서 보낸 영국인이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즉, B. H. CHAMBERLAIN은 1912년 발표한 ‘the Invention of a New Religion’이라는 글에서 당시 일본사회에 천황숭배(Mikado-worship)와 일본숭배(Japan-worship)가 일본의 새로운 종교(the new Japanese religion)로 대두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Bushido 또한 “10년 혹은 20년 전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Bushido라는 말 자체도 1900년 이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니토베 이나조와 그의 마누래

그가 말하는 1900년이란 바로 니토베의 Bushido가 간행된 시점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이는 Bushido가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끼친 저술이었는지를 확인케 한다. 니토베는 Bushido를 일본의 새로운 “규율의 기관 혹은 규율 코드”(an institution or a code of rules)로 발견하면서 그 도덕윤리로는 義·勇·仁·禮·誠·名譽·忠義를 적출하는 한편, 그 특징으로 割腹과 칼을 제시하면서 마침내 “무사도야말로 야마토 다마시”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Bushido는 니토베에게 국민국가 일본이 필요로 하는 국민의 도덕윤리였던 것이다. Bushido 혹은 武士道는 니토베에게서 비롯되고 梁啓超를 거쳐 마침내 한국에도 상륙해 文弱의 병폐를 쓸어버리고, 尙武精神을 표상할 수 있는 존재로 급속히 재발견되기에 이른다.

Painting of Ōishi Yoshio committing seppuku, 1703. 할복??? 처형의 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무사도를 표상하는 발견이 바로 ‘花郞’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이데올로그들에게 화랑이야말로 국민국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國民像, 즉, 멸사봉공滅私奉公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순국무사殉國武士로 제격이었다. 니토베가 기획한 일본의 무사도, 양계초가 이어받는 중국의 무사도에 대비되어 그 ‘조선적’ 결산을 이루는 성과도 있었으니 1940년 안확安廓의 저술로 나온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이 그것이다.

화랑이 대표하는 무사적 정신이란 文弱과 대비된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으며 그렇기에 무사정신은 곧 국가가 요구한 바람직한 국민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무사도? 내 눈엔 띨띨한 중늙은이들로만 보인다. 시대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 꼰대들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尙武精神은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를 만들고, 그 주체로서 국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애국심이라는 시민종교의 교의敎義의 하나로서 발견된 것이었다.

(2018.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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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무렵 독립기념관에서 단재 전집이 새로 나왔고, 현상윤 전집도 고려대인가에서 나왔다. 이것들을 모조리 검토했다.

내가 착목한 이는 외솔이었다. 그의 《조선민족 갱생의 도》..이 논설이야마로 상무정신의 성전이었다. 그 역시 루쉰과 마찬가지로 의사를 꿈꾸며 일본 유학을 결행했다가 전업했으니, 그의 새로운 직장은 언어가 아닌 철학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을 환자 취급하는 성향이 외솔이랑 루쉰이 똑같다.

저에서 시종일관 말하는 '시민종교'는 루쏘가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국민통합 도구였으니, 종교를 몰아낸 루쏘는 그 자리에 새로운 시민종교 교의를 제시했으니, 그것이 바로 애국심이었다. 저 시민종교를 근대국민국가를 추축하는 개념으로 재발견한 이는 따로 있다. (위와 같은 날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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