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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이상과 현실의 괴리, 창덕궁이 '자연과의 조화'라는 개소리에 대하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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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을 선전하는 문구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자연과의 조화다. 이 논리는 유네스코까지 들이밀어 그것이 세계유산에까지 등재되는 큰 발판이 되었다. 예서 자연은 노자의 그것보다 양놈들의 nature에 가깝다고 나는 본다. 그 영문 등재신청서와 그 영문 등재목록을 자세히 살핀 것은 아니로대 틀림없이 그리 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북악 자락 끄터머리 언뎍배기를 정좌한 창덕궁은 보다시피 그 남쪽 전면에 죽음의 공간인 종묘가 막아섰다. 바로 이에서 기형적인 궁궐 배치를 하게 된다.  


한데 예서 주의할 것은 자연과의 조화 실체가 무엇이냐는 거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궁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건축물들의 레이아웃 혹은 디자인이다.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서 무엇과 다른가 하는 고민을 유발한다. 


첫째 동시대 혹은 같은 한반도 문화권에서 여타 궁과 다르다는 뜻이니 예컨대 조선왕조 법궁인 경복궁과 다르다고 한다.
둘째,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궁과도 다르다고 한다. 자금성이 비교대상의 대표주자일 것이다. 


실제 이들과  좀, 아니 왕청나게 다르다. 이들 비교대상은 무엇보다 평지에 위치하며 그런 까닭에 궁이라면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그랜드 디자인을 만족할 호조건을 구비한다. 

 

왼쪽 붉은 동글배기가 왕의 공식 업무공간이다. 오른쪽 상단 귀퉁이가 사적인 공간인데, 본래는 인정전 뒤쪽 북쪽으로 가야 정상이지만 산이라 동쪽으로 비켜났다. 이는 지형에 따른 변칙이다. 


그 그랜드 디자인은 남북 중심축을 삼되 그것을 동서로 반토막 내고 그 전면은 각종 국가의례 공간으로 삼되 그 북쪽은 내리內裏라 해서 왕의 사적인 생활공간으로 구성한다. 그 중심은 전면 의례 공간 정중앙 정북쪽을 차지하는 정전이니 경복궁은 근정전이 그것이니 이는 지상에 강림한 북극성이다. 


이에 견주어 보면 창덕궁은 개판 일분전이라, 남북 중심축이 되지 못하고 꾸불꾸불 난장판이다. 한데 이 난장을 요새는 일러 포장해 가로대 자연과의 조화라 하니, 이는 새빨간 사기다. 


창덕궁이 왜 저 모양인가?

 

창덕궁의 진입공간. 돈화문이 정문인데, 돈화문과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은 본래 디자인에 의하면 남북 일직선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지형 때문에 그리 되지 못하고 꾸불탕이 되었다. 


내가 거대한 비밀을 폭로하려 하거니와 전면 종묘에서 빚어진 변칙 난공사의 여파에 지나지 않는다. 창덕궁을 제대로 디자인에 맞추어 지으려면 전면 종묘를 까부셔야 한다.


하지만 종묘를 침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것을 피하다 보니 뱀 몸뚱아리처럼 휘어졌을 뿐이다.


아! 사기여

 

(2016. 5. 9) 

 

****

 

고려왕조를 대체한 조선왕조는 새로운 도읍으로 한양을 점찍고 계획도시를 입안했다. 지금의 경복궁이 법궁法宮이자 정궁正宮이라, 이를 중심으로 왕경 설계를 하게 된다.

 

 

이것이 전형적인 동아시아 왕궁 디자인이다. 남북 일직선으로 주요 전각을 배치한다. 정문은 남쪽 복판에 위치하며 그 북쪽에 정전正殿이 정좌한다. 이곳이 바로 북극성 자리인 까닭이다. 이곳에서 중대한 국가중대사 이벤트가 펼쳐진다. 

 

왕은 남쪽 태양을 향해 남면南面하고, 신민臣民은 그 절대 군주를 향해 북면北面하고는 조알朝謁한다. 

 

경복궁 정전은 근정전이다. 

 

이 정전 뒤쪽이 실은 왕의 사적인 공간이면서, 그 안주인은 왕비다. 교태전이 왕비의 공간이다. 

 

이는 일반 사대부 주택도 디자인이 똑같다. 남자들은 안쪽 구역을 차지한다. 그래서 사랑방은 언제나 앞쪽에 위치한다. 그 뒤쪽은 부인의 영역이라 남자는 실은 잠만 자러, 씨를 뿌리러 들를 뿐이며, 외간 남자들은 이 북쪽 안뜰은 침범하지 못한다. 

 

이 북쪽 구역 여성들의 구역에 왕비를 필두로 해서, 그 엄마, 할매 등등 잔소리 대마왕 여인들이 집중 주거한다. 왕비가 마누라니깐 군림한다 해도 문제는 엄마 할매 심지어 증조모까지 살아있을 때 왕이 돌아버린다. 매일 새벽 문안 인사를 해야 하는데, 왕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새벽잠 설쳐가며 문안인사를 드린단 말인가?

 

숭례문(남대문)에서 경복궁까지. 이 길이 바로 주작대로다. 지형 때문에 약간 틀어지긴 했지만 기본으로는 디자인을 유지하려 했다. 

 

문안인사는 문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저것 시시콜콜 저 할마시들이 왕한테 각종 민원을 쏟아낸다. 

 

"주상, 내가 들으니 김태식이라는 놈이 있다는데 쓸 만하다 하오. 경북도지사 자리나 김천시장 자리 하나 주었으면 하오." 

 

왕이 돌아버린다. 그래서 어찌하는가?

 

에랏! 몰아내자! 하지만 몰아냈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 포장한다. 좋은 데 편안한데 넓은 데 모신다 해서 정궁에서 벗어나 골방에다가 별도 궁궐 지어주고는 여기 편안히 사십시오! 한다. 

 

별궁別宮은 왕의 불효不孝가 빚어낸 변칙이다.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하는 법. 경복궁 저 자리를 정궁으로 선택한 조선왕조는 그 동쪽에 종묘, 그 반대편 서쪽에 사직을 설치한다. 종묘와 사직은 국가가 존재하는 근간이면서 동작동국립묘지다. 이걸 보면 분명 조선왕조 개창자들은 지도를 그려서 사직과 종묘를 배치했다. 정궁보다 약간 안쪽으로 쳐진 지점에다가 점을 찍었다. 사직과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며 제향이다. 산 사람들의 공간이 아니다. 한데 문제가 돌발했다. 삶과 죽음의 영역이 너무 지척이다. 이 점은 두고두고 조선왕조에서 골치로 등장한다. 특히 태종시대에 창덕궁을 지으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종묘 뒤에다가, 죽음의 공간 뒤쪽에 바로 붙여서 궁궐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상과 현실, 이건 조화가 쉽지 않다. 

 

본론으로 돌아가 창덕궁이 자연과의 조화? 그 선택도 최악이었고, 실제 디자인도 개판이었다. 그 바로 앞쪽에 귀신들이 득시글하는 그런 데다가 산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해서 집을 지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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