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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간기지 흑산도가 선물하는 무심사無心寺의 흔적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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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흑산도 얘기를 할 것이므로, 지리상에서 이곳이 어드메쯤인지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 되겠다. 언제적인지 흑산도를 가 본 적은 있는 듯한데 하도 까마득한 옛날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뭐 딱 봐도 서남해를 오가는 항로에서는 격절이요, 장기 항해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딱 봐도 쉬어 가요 오빠 아니겠는가?

실제 흔적에 남은 흑산도를 봐도 그러한 역사는 유구해서 원인, 일명 엔닌圓仁 이라는 일본 승려가 지금의 후쿠오카를 떠나 당말 중국에 들어가 유학을 필두로 하는 그 지난한 생활을 일기로 정리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등장하며,

송나라 사신 서긍이라는 사람이 영파를 떠나 고려로 오는 과정, 그리고 개경을 둘러보고 다시 회귀한 과정을 적은 선화봉송고려도경, 약칭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흑산도가 남았으니, 후자를 보면 오가는 중국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관사가 따로 있었고 봉수대도 있었다고 한다.

구체로 보면 순례행기 847년 9월 4일 자를 보면 

“섬 서북쪽 100리 정도 떨어진 곳에 흑산이 있다. 산 모양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듣기로는 백제의 셋째 왕자가 도망해 들어와 피난한 땅인데, 지금은 300~400가구가 산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했으며, 

고려도경(1123) 권 제35 해도2에 이르기를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서로 바라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매우 높고 험준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첩첩이 쌓인 산세를 볼 수 있다. 앞 작은 봉우리 가운데가 동굴 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는데 배를 감출 수 있을 정도이다. 옛날 바닷길에서 이곳은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이어서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이번 여정에서는 여기서 정박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고려에서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사람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때마다 밤에는 산 정상에서 봉화를 밝히면 여러 산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 왕성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고 했다. 
 

흑산도 무심사지 전체 유구 현황
무심사지 중심권역 유구 현황

 
실제 이곳에는 산성도 있어 상라산성을 필두로 여러 군데 발굴조사가 이뤄져 관사와 제사장 자리가 확인되고 중국 동전과 중국 도자기가 다수 확인됨으로써 그 시대 판정을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해상무역 거점항이었음을 안다. 뭐 딱 지도 보면 그렇잖아? 

동아시아 세계에서 이런 데는 거의 빠지지 않고 사찰이 있기 마련이라,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면서 안전한 항해를 대신 빌어주는 기능도 수행한다. 

이 흑산도에도 이런 기능을 수행한 사찰이 상라산성 근방에 있었으니, 1987년 목포대박물관 조사에서 이곳 읍동에서 삼층석탑을 확인하고, 2000년에는 같은 대학 도서문화연구소가 상라산성을 지표조사하는 과정에서 무심사선원無心寺禪院이라는 글자가 적히 기와를 수습하면서 기록에서는 망실한 이곳 사찰 이름이 무심사無心寺임을 알게 되었다.

무심사 터는 성라산 남동쪽 협곡에 위치한 산지형 가람으로, 앞서 말한 삼층석탑 말고도 석등이 있으며, 그 남동쪽에 관사터 및 읍동유물 산포지가 위치한다. 
 

조사 현장

 
이를 발판으로 2011년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처음으로 그 사역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기에 이르고 이후 여러 기관에서 조사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곳은 절터라 해서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조사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에도 신안군, 대흥사와 더불어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진리 721-2번지 외 4필지(1천948.9㎡)를 팠으니, 이곳은 동서 방향 장축이며, 축대와 담장, 당산나무(팽나무)가 위치한다.

나아가 그 북서쪽에 이곳 주민들이 쓴 무덤이 세 곳 이상 있는데 이 무덤 중 하나를 현지에서는 장군묘라 한다나? 

이전 발굴조사에서 강당 터를 비롯한 건물터 다섯 곳이 드러났다.   
 

중심권역 유구 노출 전경

 
이번 조사 결과 자연층인 적갈색 점질토 및 하부 연황색 점질토를 기반층으로 삼고 선문, 어골문 기와편 및 해무리굽 청자편, 토기편,  순청자편 등이 포함된 회갈색 사질점토층 내부에서 건물터와 1차 유구를 확인하고 

그 상부에 증축한 건물터와 귀목문 막새편(1244년 제작) 및 어골문 기와편, 상감청자편 등을 확인했으며 

축대 확장부는 최소 2회 이상 증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시기별 중심사역 경계 축대가 확장했다고.) 

이로 볼 때 무심사는 8세기 후반~14세기 중반 유물 산포를 보이지만 중심 시기는 12~13세기라 서긍이 지난 그 무렵이 가장 흥성하던 때임을 미루어 짐작하겠다. 
 

금동불상 발편

 
유구는   

1차 유구가 자연층 및 8세기 중반 인화문 토기편이 포함된 적황색 사질점토층을 기반으로  건물지 2동, 축대 5기, 석렬 3기를 확인했고

2차 유구는 어골문 기와편 및 청자편이 포함된 회황색 사질점토층을 기반으로 건물지 1동, 축대 1기, 석렬 1기를 확인했다.
  

 

年六月造
中元甲辰(?)年六月造
年六月造
中元甲辰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 : 인화문 토기편, 월주요계 해무리굽 청자편, 선문기와편 등
고려시대 : 순청자편, 상감청자편, 어골문 기와편, 격자문 기와편 등


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의의를 정리하면 

ᆞ 무심사선원 관련 유물(막새편, 기와편)이 중심 3시기로 확인되며, 건물지는 대상부지에서 2시기 중복된 상태로 확인
ᆞ 무심사선원 중심 사역범위를 확인하고, 중심건물지가 확인됨
ᆞ 이번 시・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물을 통해 무심사선원은 8세기 중반 창건되어 14세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
ᆞ 중심 사역은 탑 및 석등이 위치한 금번 조사지역이며, 향후 미발굴지(당산나무 주변)에 대한 조사를 통해 무심사선원 관련 중심건물의 규모 및 특성이 확인될 것으로 기대 

 

주름무늬 인화문 토기편
중국제 도자기편

 
 
뭐 요런 식으로 정리하네? 

이번 조사는 사역 확인과 중심사역 정비계획을 수립하고자 2021년 4월 26일 이래 실시 중이라고.

저 말들은 어렵고 보도자료는 이렇다.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2동, 축대 6기, 석렬 4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중심사역의 통일신라시대 금당지는 고려시대 중기 건물지 아래에서 중복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인화문 토기편을 비롯하여 금동불상 발편, 중국제 도자기편, 연화문 막새편 및 ‘中元甲辰年六月造’명(1244년) 막새편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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