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막말인물전 14] 전봉준의 프로필

by 초야잠필 2024. 7. 22.
반응형

잡혀가는 전봉준. 가마 타고 갔음



우리 동학혁명군 수장 전봉준 선생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전봉준은 1855년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 당촌 몰락 양반 출신인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 다른 이름은 전형호(全亨鎬))와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안 전씨 족보에 의하면 족보상 이름은 영준(永準)이요, 봉준(琫準)은 어릴적 이름이며 녹두(綠豆)는 그 체구가 작아서 불린 별호라 한다.[2]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어머니 김씨는 언양 김씨 설과 광산 김씨 설이 있다.


몰락한 양반이었으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적이 있는[3] 지역의 명사이자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평소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약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소년기의 전봉준은 기억력이 총명한 소년이었는데 5세 때에 한문을 수학 했고 13세 때에는 '백구시'(白鷗詩)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3]


청소년기
서당에서 훈장으로도 활동했으며, 동시에 접주(接主)[4] 일도 하고, 지관으로 묘자리도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5] 또한 시장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며 장사에 종사하기도 했다.

1893년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을 하다가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 2천 냥을 안 거둬 줬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게 되어[6] 몸이 허약해지더니 이내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 일이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스스로를 선비라고 칭하며, 농민이기도 하였다.



눈매 날카로운 전봉준


전봉준 선생 프로필은 
일본이라면 하급무사와 향사 사이에 흔히 볼수 있는 그것이다. 

따라서 전봉준 선생이 일본에서 1860년대 청년이었다면
틀림없이 탈번해서 메이지유신의 격랑으로 뛰어 들었을 것이다. 

전봉준 선생의 정체성도 스스로를 선비 혹은 농민으로 인식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농민이자 사무라이이며 극빈층인 하급 무사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동학전쟁에는 수백 수천 수만의 전봉준이 있었을 것이다. 


*** previous article ***


[막말인물전-13] 직업 킬러 오카다 이조岡田以

신센구미 간부 히지가타 도시조. 원래 부농의 아들로 신센구미에 합류하기 전 포목상 직원, 약장수 등을 겸업하고 있었다. 막말에 막부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은 사람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