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년 11월 1일 출범한 김훈 막부정권은 존속기간이 아주 짧아 불과 4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그 사이 민심은 흉흉해져 쿠데타가 발발한 11월에는 난데없이 수도 개경에서 승려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헛소문이 돌아 비상계엄이 발동되었는가 하면, 이듬해 1월에는 압록강을 끼고 다리를 건설하고는 그 동·서쪽에 성을 쌓을 거란을 징벌하고자 군대를 보내 시설을 파괴하고 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런 거란이 1월 22일 계묘에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고려에서는 장군將軍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이 맞서 물리치기도 했지만 거란의 공세는 계속되어 통주通州를 공격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3월이 되자 현종은 서경 행차를 단행한다. 이것이 거란과 계속 부닥치는 서북면 일대 민심 안정화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이는 명분이요 실제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주연 각본 감독 모두 현종이었다. 이 기회를 빌려 막부를 타도하려한 것이며 그 의도는 성공했다.
서경 장락궁長樂宮에 도착한 현종은 호종한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는 거나한 주연을 베풀었다.
부어라 마셔라, 특히 막부 정권 수뇌들이 한 꼬푸 두 꼬부 부어라 마셔라 주었더니만 다 나가 떨어졌다. 당시엔 발렌타인 30년산은 없었으니 독한 소주를 먹인 모양이다. 이 순간을 기다린 현종이 눈짓하자 옆에서 이제나저네나 신호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던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 이자림李子琳이 미리 대기한 군사들을 발동하여 무신들을 난도질하니 그 자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핏빛 바다가 되고 말았다.
막부 정권 양대 실력자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말고도 이협李恊·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이섬李暹·김정열金貞悅·효암孝嵓·임맹林猛·최구崔龜 등 막부정권 수뇌 19명이 목이 달아났다.
넉달 전 당한 수모를 현종은 피로 되치기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고려사절요는 이리 적었다.
이 당시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문관직을 겸하여 정사가 많은 문외한들에게서 나오게 되니[政出多門],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전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이자림李子琳은 은밀히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말하기를 “왕께서는 어찌 한漢 고조高祖가 운몽雲夢에서 노닐었던 일을 본받지 않으시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맹이 그 뜻을 깨닫고 은밀히 아뢰자, 왕이 이를 받아들이고는 이자림이 일찍이 서경西京의 장서기掌書記가 되어 자못 인심을 얻었다고 하여 곧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을 임시로 제수한 뒤 곧바로 명령을 내려 먼저 가서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자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서 병사들로 기습하여 그들을 죽였다. 최구는 유생[儒士]으로서 병부낭중兵部郞中이 되어 호종을 맡았는데, 성품이 거칠고 비루하여 최질 등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참말로 처절한 복수였다. 넉달 전 쿠데타가 성공했을 적에 군인들이 했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밍기적한 일이 이리 비수가 되어 그들의 등을 찌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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