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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3차 고려 막부정권] (4) 쿠데타 이틀 만에 막부를 만든 김훈과 최질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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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그린 김훈(가운데)과 최질. 왕궁 호위를 담당한 상장군이었다.

 
상장군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주도한 쿠데타 군은 개떼처럼 궁궐로 들이닥쳐 덕석 말이를 해서 흠씬 두들겨 팬 황보유의黃甫兪義와 장연우張延祐를 현종 앞에 던지며 이 놈들을 내쫓으라 요구한다. 

앞선 왕 목종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를 생생히 기억하는 현종으로서는 아이고 나도 형님따라 가는구나 하고 자포자기했겠지만, 그네들 요구사항을 들어보니 순진하기 짝이 없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들이 왕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그들을 요구를 거부하면? 그 자리서 쫓겨나거나 목이 달아나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 고려사절요 기술은 다음과 같다. 

왕은 여러 사람(쿠데타 주역들) 뜻을 거스르기가 조심스러웠으므로 일단 그들의 청을 따라 마침내 〈장연우와 황보유의 두 사람을〉 제명除名하고 유배 보냈다.

이때가 현종 재위 5년, 1014년 음력 11월 계미癸未 삭朔이었다. 11월이 시작하는 그달 첫날, 간지로는 계미일인 그날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쿠데타 성공한 정권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위선은 막부幕府를 만드는 일을 착수한다. 박정희가 집권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기였고, 12·12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약칭 국보위 창설이었다. 재건회의와 국보위는 근간이 막부! 였다. 

저들보다 불과 5년 전, 1009년 쿠데타를 감행하고 집권한 강조康兆와 이현운李鉉雲 역시 가장 먼저 한 일이 막부 수립이라, 이는 곧 기존 문관 중심 행정기구 혁파를 의미했으니,

은대銀臺와 중추남원中樞南北·중추북원中樞北院을 혁파하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하여 세 기관 업무를 모두 귀속케 하고는 강조를 중대사中臺使로 삼고, 이현운을 중대부사中臺副使로 삼았다

했거니와, 이것이 막부 수립 아니고 무엇이랴? 

이 막부에는 항상 얼굴 마담이 필요한 법이라, 이 얼굴마담은 언제나 꿔다논 보릿자루여야 했고 무엇보다 군사 색채가 전연 없으면서도 말을 잘 듣는 문관이어야 했다. 강조의 경우 그 얼굴 마담으로 채충순蔡忠順과 윤여尹餘라는 문관을 내세웠다. 

김질과 최훈의 경우는 어찌 했는지 기록 망실 혹은 누락 때문인 듯한데, 이 얼굴마담이 언뜻 드러나지 않는다. 내 조사가 철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보통 이런 막부 수립은 몇 달이 걸리기 마련인데, 김질과 최질 막부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쿠데타 감행 불과 이틀 뒤인 11월 3일 을유乙酉에 막부를 출범시켜 버린 것이다. 

을유에 김훈金訓 등이 상참常參 이상 무관武官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어사대御史臺를 혁파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할 것과 삼사三司를 혁파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할 것을 청하나니 (현종이) 이를 따랐다.

이 짧은 고려사절요 적기摘記가 왜 저들이 쿠데타를 감행해야 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데는 앞서 든 영업전 운운한 대목보다 더욱 중요하다. 

왜? 저기에 진짜 무신들 불만이 숨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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