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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3차 고려 막부정권] (7) 달래야 하는 군인들

by taeshik.kim 202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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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우(왼)와 황보유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막부를 타도한 현종은 1015년 4월 서경에서 개경으로 귀환한다. 시급한 과제는 막부 이전으로 사회를 돌리는 일이었다. 

같은해 7월, 막부 최고기구인 금오대金吾臺를 혁파하고는 사헌대司憲臺를 두었다. 이 사헌대는 조선시대 사헌부랑 거의 역할이 같을 것으로 본다면, 간쟁을 담당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사찰에 가까운 기구였다. 

그렇지만 드러난 불만을 막부를 타도했다 해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같은달 도병마사都兵馬使 제안에 대한 응답 형식을 빌려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임영함林英含, 그리고 그 수하 병사 1만2천500여 명이 모두 변경에서 공적이 있다 해서 그 자급資級을 하나씩 올려 포상했으니, 돈이 얼마나 더 들어간 일이었겠는가?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하며 이런 식으로 막부를 타도한 보상을 하려한 조치로 나는 본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렇게 포상 받은 정신용은 같은해 9월 갑인일 거란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너무 띄워주면 물불 안가리고 목숨을 바치는 법이며, 그런 방식을 어쩌면 현종은 알았는지도 모른다.

거란이 와서 통주通州를 공격하자 흥화진興化鎭 대장군大將軍 정신용鄭神勇과 별장別將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란군 뒤쪽으로 가서 공격하여 700여 급을 죽였으나, 정신용 등 6인은 이때에 전사하였다.(고려사절요) 

이 전투에 태의승太醫丞과 태사승太史丞이 출전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태의승은 아마 종군의사 역할을 했다 할 수는 있지만, 이런 전투에 왕이 자기 주치의를 보낸다? 이채롭다.

나아가 태사승은 명칭으로 보아 기록 담담관이었을 법한데, 이런 사람들이 보통 점치는 일도 담당하는데, 혹 그런 일을 한 일관日官 아니었나 상상해 본다. 

거란의 공세는 계속 이어져 그해 9월 20일 정묘에는 영주성寧州城을 공략했으나 소기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대장군大將軍 고적여高積餘와 장군將軍 소충현蘇忠玄·고연적高延迪, 산원散員 김기金己, 별장別將 광참光參 등이 도망가는 거란군을 추격하다 되치기 당해 전사했는가 하면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좌王佐와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는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김훈(오른)과 최질(왼).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막부 정권을 세웠다가 일망타진된 김훈과 최질은 사후 1년 정도가 지난 1016년 2월에 사면복권에 가까운 조치가 이뤄진다. 

김훈金訓 등의 부모·처·자매·조부·손자·형제[叔伯]로서 연좌된 자들을 모두 풀어주었으며, 그 아들은 동복[同產] 형제와 마찬가지로 본관本貫으로 돌려보내되 상례적으로 시행되는 사면에서 용서받지 못하게 하였다.

완전한 사면복권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무엇보다 당시는 거란과 사투에 가까운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고, 그런 까닭에 어떤 식으로건 군인들을 달래야 한 까닭이었다. 

강조와 김훈은 군인들도 권력을 잡을 수 있음을 만천하게 공포했다. 비록 그 집권은 짧았지만, 이런 자신감 혹은 가능성은 백년 후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따라서 저들은 막부 정권의 진정한 개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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