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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모란이라고 다 같은 모란이 아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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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 영향이긴 하나, 글자 그대로는 목단(牡丹)이라고도 읽는 모란이 낙양과 장안 중심 중원에 알려져 완상용으로 적극 재배되기 시작한 시점은 당 현종 개원(開元) 연간(713~741)을 올라가지 아니한다. 간단히 말해 모란은 개원 연간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원에 알려져 재배되기 시작했으니, 각종 기록을 종합할 때 모란은 지금의 산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건조 사막지대에서 들어왔다. 


하지만 모란 열풍은 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니, 개원 연간에서 대략 반세기 혹은 백년이 지난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연간(806~820)은 그야말로 모란의 전성시대였다. 이 무렵이면 이미 모란은 중원을 떠나 장강을 넘어 강남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시인들은 모란을 읊기에 여념이 없었다. 


연합DB


따라서 모란이 꽃중의 꽃 화왕(花王)으로 등장한 시점은 개원 연간도 아니요, 아무리 봐도 원화 연간이다. 물론 그 이전 개원 연간과 원화 연간 사이에 그것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해서 화왕에 올려놓은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모란의 화왕 등극과 전성은 원화 연간이다. 


이에서 원화 연간이 되면, 모란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연원을 추적하기도 하거니와, 유종원 같은 이는 모란을 읊은 시가 이미 북제(北齊)인가 있었다는 근거를 들이대기도 했으나, 내가 추적한 결과 이는 낭설이었다. 송대에 들어 사마광인지 구양수인지 아니면 소식인지 기억이 아리까리 하나, 모란이라는 글자에만 착목해 그것이 이미 한대(漢代)에 있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개소리에 지나지 아니했다. 


근자에는 한대漢代 목간인지 하는 당시 출토 문헌에서 모란이 보임을 근거로 모란 재배 역사를 끌어올리기도 하나, 이 역시 개소리라, 모란이 중원에 진출한 시기는 개원연간이며, 그것이 극성한 시대는 원화 연간임은 움직일 수 없다. 


연합DB


그렇다면 개원 연간 이전 간혹 한의학서라든가 출토 문헌에 보이는 '모란'은 도대체 무엇인가? 


당 고종 현경(顯慶) 4년(659)에 소경(蘇敬)이라는 사람이 완성한 《신수본초(新修本草)》에 왜 그런 현상이 빚어지게 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대목이 있다. 


그에서 '牡丹'이라는 항목을 설정하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거니와, 


味辛、苦,寒、微寒,無毒。主寒熱,中風,螈 ,痙,驚癇,邪氣,除症堅瘀血留舍腸胃,安五臟,療癰瘡。除 時氣,頭痛,客熱,五勞,勞氣,頭腰痛,風噤,癲疾。一名鹿韭,一名鼠姑。生巴郡山谷 及漢中,二月、八月采根, 陰乾。

畏菟絲子、貝母、大黃。今東間亦有,色赤者為好,用之去心。按鼠婦亦名鼠姑,而此 又同,殆非其類,恐字誤。


〔謹案〕 牡丹,生漢中。劍南所出者,苗似羊桃,夏生白花,秋實 凋,根似芍藥,肉白皮丹。出漢、劍南,土人謂之牡丹,亦名百兩金,京下謂之吳牡丹者,是真也。今俗用者,異於此,別有臊氣也。


피기 직전 모란


이에서 '〔謹案〕'이라는 데서 설명하는 구절이 중요하거니와,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牡丹으로 한중漢中과 검남劍南에서 나는 것은 싹이 양도羊桃와 비슷하다. 여름에 흰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는 조락한다. 뿌리는 작약芍藥과 비슷하며 속은 희고 겉은 붉다. 한남과 검남에 나는 것을 그쪽 사람들은 '모란牡丹'이라 부르는데, 양백금(百兩金)이라 부르기도 한다. 京下에서 오모란(吳牡丹)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세속에서 사용하는 것과 이 모란은 다르니, 따로 臊氣가 있다. 


이에서 보듯이 같은 모란이라는 이름으로 일컫기는 해도 우리가 아는 모란과는 전연 다른 종이었다. 


따라서 한대 이래 한의학서 등지에서 더러 보이는 모란은 그 모란이 아니다. 이 점을 망각하면 참사가 빚어진다. 


이 문제는 결국 설총이 지어 신문왕한테 바쳤다는 화왕계花王誡라는 글의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이 화왕계는 신문왕 무렵에 등장할 수가 없다. 설총으로 가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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