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공사가 한국주택공사와 강제합병해 탄생한 더한 괴물 공기업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박물관 운영시스템이 다른 공기업에는 모범이라 할 정도로 운영을 알차게 하는 축에 속한다. 그 산하 토지주택박물관은 진주 본사에 그럴 듯한 전용 건물채도 갖추어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를 번갈아 행한다.
한국토지주택박물관 소장 심원권 일기
이 토지주택박물관이 실은 외부에는 아직 그닥 소문이 난 편은 아니나, 손꼽히는 고문서 콜렉터다. 아무래도 박물관 특성상 토지와 관련한 문서가 많은 편이어니와, 그 숨은 힘은 IMF다. 너도나도 못 살겠다 나가 떨어질 때, 고문서 역시 여러 이유로 그렇게 못 살겠다는 사람들 손을 떠나 고미술 시장에 쏟아져 나왔으니, 기회는 이때다 하고는 이 박물관이 냅다 뭉탱이로 사들인 고문서가 보물이 될 줄이야?
그런 보물 중에 현재도 상설전시 중인 일기 한 편이 있으니, 이 일기는 내가 지금껏 만난 조선시대 일기 중에는 젤로 골 때리는 편에 속한다. 그 일기가 나중에 공개되었으니, 어떤 점에서 이 일기가 그러한지는, 2006년 내가 소개한 기사로써 들고저 한다.
2006.03.26 07:00:05
<64년간의 기록 '심원권일기'>
국사편찬위원회 탈초 마치고 3권으로 완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21살 때인 1870년(고종 7) 11월을 시작으로 83세가 된 1933년 12월10일까지 무려 64년 동안 부모상을 당한 3일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선 믿기가 쉽지 않다.
한국토지주택박물관 소장 심원권 일기
이 60여 성상 동안 10일 단위로 시장에 나가 쌀값을 비롯한 물가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남겼다는 것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런 일기가 지금까지 단 1장의 탈락도 없이 고스란히 전한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1871년 신미양요와 1882년 임오군란, 1894년 청일전쟁과 갑신정변, 1904-5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조선 패망, 1919년 3.1운동…
그런데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 격동기를 살았음에도 어떻게된 일인지 이런 세태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1910년 양력 8월 29일, 조선왕조가 패망했음에도 이날 일기에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거주하지 않고, 울산이라는 당시로서는 한적한 시골에 사는 사람이라 혹시나 국망(國亡)의 소식이 늦게 전해졌기 때문일까 하고, 그 즈음 약 한 달간의 일기를 뒤져도 도통 나라 패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대신 온통 날씨와 바람과 구름과 물가와 주변 친지 얘기 뿐이다.
한국토지주택박물관 소장 심원권 일기
그렇다면 혹여 새로운 통치자가 된 일본인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세태와 관련한 감회라든가 언급들을 일기에서 누락시킨 것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일기 작성자는 너무나 평범한 농민일 뿐이다. 젊은 시절 한때 여느 유생처럼 과거 급제를 꿈꾼 몰락한 양반 혹은 향반으로서, 80여 평생 동안 서울은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고, 대도시라고는 오직 대구에 간 것이 전부일 뿐, 일생을 자기집 반경 4㎞ 내에서만 활동한 사람이 남긴 이 일기가 후세를 위해 작성된 기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심원권일기'는 조선 민중들이 국망에 대해서 울분을 느끼기는 커녕 국가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갖게한다.
이 일기는 그 원본을 현재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이 소장하고 있다. 원래 동국대 경주분교에 재직 중인 한국고문서학회 한 회원이 수집해 소장 중이던 것을 토지박물관에서 매입했다. 이 일기를 발견하고, 나아가 거기에 담긴 내용에 경악한 이는 한국경제사 전공인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였다.
현재 한국고문서학회장인 이 교수를 흥분케 한 것은 이 일기에 기록된 물가였다. 60년치나 되는 물가 변동 자료가, 그것도 10일 단위로 변동한 물가 변동 내역서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심원권 일기'는 이영훈 교수를 통해 마침내 학계에 공식 데뷔하게 됐다.
원래는 양반이기는 했으나, 일생을 농업에 종사한 향반 심원권의 일기에는 이 뿐만이 아니라 농민 특유의 천문, 기상, 땅값, 농업 등 이른바 생업경제에 관한 중대한 증언들이 고스란히 수록돼 있다.
이 방대한 '심원권일기'가 이번에 탈초(脫草)를 끝내고 정서체로 바뀌어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에서 전 3권으로 완간됐다. 탈초란 읽기 어려운 필기체를 정서체로 바꾸는 작업.
국편은 탈초뿐만 아니라, 원문에 구두점을 찍고, 나아가 각 날짜의 일기마다 그 내용의 핵심어를 추출해 적시함으로써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했다.
한편 토지박물관은 조만간 이 일기에 대한 보물 신청을 할 예정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그렇다면 이 일기가 표방하는 철저한 현실정치 무시는 심원권만의 의식이었을까?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부러 심원권은 그런 사실을 누락한 일기만 쓴 것일까? 저 기사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후자와 관련해서는 나는 부러 심원권이 일기를 저리 쓴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본다.
우리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면 제아무리 민초라 해도 한 번쯤은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전국민까지 파고드는 우국충정은 조선시대에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우국충정이 모든 국민한테 파고든 상태로 무장한 국가를 국민국가nation state라 부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시대 이전까지 '국민國民'이 있을 리가 없었고, 그런 까닭에 우국충정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 우국충정은 사대부 계층, 그것도 극히 일부 사대부에만 해당하는 사안이었을 뿐이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임금이 죽건 말건, 아무도 관심 없었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오직 날씨가 어떤가? 쌀값은 어떤가? 내 자식 내 부모 근황은 어떤가?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까? 하는 극히 본능이 전부였다.
심원권에게는 나라가 망하건 말건, 임금이 죽건 말건, 3.1운동이 나건 말건, 임오군란이 일어나건 말건, 나랑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한, 내가 눈길 한 번 줄 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심원권은 결코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그 시대 소위 민중 혹은 민초 저층을 대변하는 일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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